1924년 7월 13일
플래시백
1924년 6월 5일 전라남도 목포재판소 구내가 갑자기 떠들썩해졌습니다. 400명 넘는 농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죠. 농민들은 경찰이 붙잡아 예심에 넘긴 13명을 내놓으라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목포에서 기선으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섬, 암태도 농민들이었죠. 단순한 농민이 아니라 전해 12월 결성된 소작인회 회원들이었습니다. 보리타작과 모내기 준비로 한창 바쁠 때 육지로 몰려갈 정도로 절박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암태도는 약 35㎢의 자그마한 섬입니다. 주민들은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갔죠. 그런데 이 섬 농토의 3분의 2는 지주 문재철의 소유였습니다. 문재철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북도에까지 땅을 소유하고 있던 만석꾼이었죠. 암태도만 해도 문재철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문재철이 추수한 곡식의 70~80%를 소작료로 받아간다는 점이었죠. 소작인들에게 문재철은 그야말로 ‘악덕 지주’였습니다.
문재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양보는커녕 힘깨나 쓰는 마름을 앞세워 농민을 각개격파 하는 식으로 소작료를 빼앗아갔죠. 그러다 양측이 서로 충돌해 소작인들이 다쳤습니다. 소작인회의 고발을 받은 일제 경찰은 지주-소작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며 뒷짐을 지었죠. 일제 공권력은 지주 편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은 면민대회를 열어 5월 15일까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문재철 아버지의 송덕비를 깨버리겠다고 결의했습니다. 효자였던 문재철의 약점을 노린 전술이었지만 결국 송덕비가 부서지고 양쪽의 싸움이 터졌죠.
일제 경찰은 이때다 싶어 소작인회 쪽 13명을 구속해 목포로 끌고 갔습니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소작인회 회장 서태석 등 간부까지 싸잡아 압송했죠. 문재철 쪽은 2명만 구속했고요.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 없던 소작인들 400여 명은 6월 4일 돛단배를 타고 목포로 쳐들어갔습니다. 쌀과 솥, 김치 등을 챙겨 관공서 마당에서 밥을 지어먹고 모기에 물리며 이슬을 맞는 한뎃잠을 자면서 동료들을 풀어달라고 했죠. 당황한 일제 관헌은 먼저 해산하면 선처해보마고 했죠. 양식도 떨어진 소작인들은 6월 8일 일단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13명을 상해와 소요죄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암태도 소작인들은 이번에는 600여 명이 목포지청에서 ‘다 같이 굶어죽자’며 단식농성에 들어갔죠. 7월 8일부터 ‘아사동맹’에 돌입한 겁니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요로 삼아 옷이 흙투성이가 되고 주린 배를 움켜쥐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칠순 노인들과 젖먹이를 품에 안은 엄마들이 무려 200명이 넘었죠. 농성장은 노인들의 신음소리와 젖 달라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처참했습니다. 보다 못한 목포 사람들이 죽을 쑤어 왔지만 노약자를 빼고는 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죠. 단식농성은 14일까지 무려 6박 7일간이나 이어졌습니다.
암태도소작쟁의에 각계 사회단체들의 성원이 집중되고 해외에서까지 기부금이 들어오자 일제는 중재에 나서야 했죠. 결국 8월 30일 소작료를 4할로 하고 지주가 2000원을 기부하며 서로 고소를 취하하고 송덕비는 소작인회가 복구하기로 했습니다. 암태도소작쟁의는 1920년대 최고의 농민 승리이자 항일운동으로 꼽히죠. 지도자 서태석은 초기부터 동아일보 목포지국 설준석 기자와 손잡고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岩泰小作事件(암태소작사건)前後(전후) 經過(경과)의 詳報(상보)
무안군(務安郡) 암태면(岩泰面) 소작인 륙백여명이 지난 팔일부터 목포 광주디방법원 지텽 구내에 쇄도하야 금번의 소작쟁의(小作爭議)로 말미암아 예심(豫審)을 마치고 공판에 부치여 잇는 소작회 간부와 밋 회원 열세 사람을 내여달라고 부르짓고 잇는 현상은 임의 작보에 보도한 바어니와 이제 그 자세한 뎐말 내용과 목도한 사실을 긔록하면 지난 칠일에 암태면 암태도(岩泰島) 주민 일동은 그곳에 잇는 소작인회(小作人會) 부인회(婦人會) 청년회(靑年會) 삼 단톄가 련합하야 면민대회(面民大會)를 개최하고 구금중(拘禁中)에 잇는 열세 사람을 건저낼 것을 굿게 결의하게 되야 이번에는 우리가 지난 번에 사법관에게 속아 실패한 것을 경험삼아 엇지 되엿던지 최후의 해결을 엇자는 뜻으로 만일 이번 길에 열세 사람과 가치 도라오지 못하게 되는 때는 우리는 그 법뎡(法廷) 안에서 다 가치 굴머 죽자는 구든 결심을로 모다 거름을 가치 하자는 약속 밋헤 주민 륙백여명은 늙으니와 젊은 사람의 구별도 업시 남자나 녀자를 뭇지 안코 누구나 모다 흥분되야 즉시 열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그 이틀 되는 팔일 밤 황혼에 목포지텽(木浦支廳) 구내에 살긔가 가득한 야영(野營)을 일우게 되엿다.
幕天席地(막천석지)
=으스름 달 알에
하루 밤을 새여
이와 가치 불의의 변을 당하게 된 재판소에서는 엇더한 태도로써 그들에게 임하엿는가? 위선 지텽댱(支廳長)은 경찰서댱과 협의하야 군중의 대표자(代表者) 서광호(徐光浩) 씨를 먼저 회견하고 일반 군중에게 속히 도라가는 것이 뎨일 량책이라는 뜻을 말하고 제이차로는 대표자 박복영(朴福永) 서광호、김정순(金正順) 김상규(金相圭) 고백화(高白化) 등 제씨를 회견하고 역시 한 뜻으로 조곰도 확실한 대답이 업시 그대들이 이곳에 공연히 머물고 잇는 것은 일의 해결을 위하야 조곰도 리익이 업스니 이 뜻을 군중에게 전하야 량해를 식혀달라는 말로써 간졀하게 권고를 하엿스며 이와 가치 두 차례나 일러도 군중은 의연히 도라갈 생각이 조곰도 보이지 아니함으로 세 번재는 할 일 업시 경찰서댱으로부터 경비소(警備所)를 열어줄 터이니 모다 그곳으로 도라가서 오날밤을 새우라 하엿스나 일반은 이런 말에 귀도 기우리지 안코 그냥 그 자리에서 더풀 것 깔 것도 업시 대디(大地)로 요를 삼고 창공(蒼空)으로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뭇던지 마던지 조라드는 창자야 끈어지던지 마던지 오즉 한아 집을 떠날 때에 작뎡한 마음으로 습긔가 가득한 밤이슬을 마지면서 말은 정강이와 해볏에 끌은 두 빰을 인정 업는 모기들에게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등 마는 등 또다시 그 잇흘 되는 초구일을 당하게 되얏다.
『詳細(상세)는 不知(부지)』
질서를 문란하게 하면
처차하겟다고
中島木浦署長(중도목포서장) 談(담)
다시 중도(中島) 경찰서댱을 방문한즉
『나는 경성고등경찰계에 잇다가 지난달 이십사일에 이곳에 새로히 부임하엿스니까 자세한 최초의 것은 알 수 업슴니다마는 하여간 재판소에서는 될 수 잇는대로 온건한 처분을 할 작뎡 가치 보히며 이번 일로 인하야 특별히 군수나 법원댱들이 모혀서 무슨 회의를 한 일도 업슴니다. 오즉 경찰서에서는 재판소의 지휘를 조차서 그들을 처분하겟슴니다마는 일전부터 대표자들에게 향하야 속히 각각 도라갈 것을 루루히 알려주엇스며 만일 시내로 도라다니며 밥을 구한다든지 엇저니 하야 질서를 문란할 염려가 잇는 때는 그저 둘 수 업스나 아모 것도 모르는 사람들임으로 참 함부로 제재할 수도 업고 심히 딱한 노릇이올시다. 본래 재판소 구내에 저러케 와 잇는 것부터도 하지 못할 일인 줄 암니다. 그리고 열세 사람의 피의인(被疑人)들은 최초부터 검사국으로 곳 다려간 까닭에 경찰서에는 청취서(聽取書) 가튼 것도 업슴니다.』
飢餓(기아)、恐怖(공포)、忿怒(분노)
老翁(노옹)과 少婦(소부) 二百餘名(2백여명)
굴문 어미에게 매달린 어린 목숨
이와 가치 불상한 정경과 참혹한 현상을 알아주는 자 업시 오즉 그네들 자신으로 자위할 뿐이엇는데 륙백여 군중 가운데는 백발이 뒤덥힌 칠십 로파와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부인이 근 이백여명이나 된다. 이곳저곳에 허터저서 둘식 셋식 머리를 맛모으고 세상을 한탄하며 사람을 야속타 하고 지친 다리와 압흔 허리를 두다리며 아이고 대고 신음하는 늙으니의 비애와 아모 것도 모르는、텬사 가튼 어린 것들의 젓 날나는 울음、정신이 씩씩한 젊은 사람들의 긔운과 함께 어우러저 하염 업는 인생의 비애로 일시에 폭발되엿다. 굼주린 창자를 힘 업는 두 손으로 웅켜 잡고 팔일부터 구일까지 이틀 동안이나 아모 것도 먹지 안코 밤과 낫으로 말할 수 업는 괴로움을 당하고 로약(老弱)과 어린아이들은 몸을 잘 긔동할 수도 업시 쇠잔하야지게 되야 마츰내 암태면(岩泰面) 단고리(短庫里) 박씨(朴氏)(五○‧50)는 졸도를 하고 직시 제중의원으로 수용되엿스며 광경이 이에 이르매 목포시내의 유지 청년들은 이 현상을 크게 근심하야
위선 먹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죽(粥)을 만들어다가 여러 번 강권하엿스나 결국 로약과 몃 사람 외에는 먹는 사람이 업고 그 중 삼분의 이는 그 잇흔날 오후 점심까지 만 삼일 동안을 아모 것도 먹지 안앗스나 일행 중 로약들은 강권으로 역시 입을 되는대로 축이게 되엿스나 일 푼 돈이 업고 한 줌 쌀이 업는 그름들은 장차 엇지 그날그날을 지내갈는지 실로 중대한 문뎨이며 십일 오전에도 역시 경찰서댱과 재판소에서 대표를 회견하고 오후에는 무안군수 김동우(金東佑)씨가 자긔 사택(舍宅)으로도까지 대표들과 만나 보앗스나 아모 해결을 보지 못하엿스며 뎨사일 되는 재작 십일일 오전에는 제주(濟州로부터 도라왓다는 광주디방법원댱과 수석판사들이 일반 군중에게 『오즉 공명정대한 사법당국을 밋고 속히 도라가라』는 것을 말하매 군중 가운데 몃 사람은 압헤 나아가 땅우에 업듸리어 소원을 들어달나 하엿스나 법원댱은 면회도 거졀할 뿐더러 아모 말도 듯지 아니하고 오즉 할 말이 잇거든 광주(光州)로 오라고 하며 자동차를 모라 도라가 바렷다. 이리하야 목포에 도착한 후 사일 동안에 전후 사오차의 교섭이 잇섯스나 하등의 결과를 엇지 못하고 군중은 의연히 긔아(饑餓)와 공포(恐怖) 분로(忿怒)에 싸여 잇다.
判事(판사) 發怒(발로)
아모 말도 안 할테니 질문을 뎡지하라고
금번 사건에 관계자 무안군(務安郡) 암태면(岩泰面) 긔동리(基洞里) 서태석(徐邰晳)(四○‧40) 박홍원(朴洪源)(三五‧35) 박응언(朴應彦)(二九‧29) 서동수(徐東洙)(二五‧25) 서창석(徐倉錫)(三三‧33) 소작회위원댱 서민석(徐珉晳)(二三‧23) 김연태(金淵泰)(三七‧37) 손학진(孫學振)(二九‧29) 등 여덜 명과 동면 단고리(短庫里)에 거주하는 박필선(朴弼善)(四○‧40) 박병완(朴炳完)(四○‧40) 김운재(金云宰)(三六‧36) 박용산(朴用産)(三八‧38) 김문철(金文喆)(二七‧27) 등 도합 열세 명은 모다 예심 중에 잇다가 지난 삼일에 종결을 마치고 모다 소요(騷擾) 급(及) 상해(傷害)죄라는 명목 하에서 공판을 열게 되엿다는데 이 사건을 수리하는 신등(新藤) 검사 중촌(中村) 예심판사 대우(大友) 수석판사는 일절 입을 담을고 한마데를 내이지 안으며 그중에도 대우(大友) 판사는 무슨 까닭인지 긔자를 대할 때 성을 펄적 내이면서 공연히 되지도 안는 말로 남의 사무실을 왜 드러오느냐 마느냐 하는 말로 이번 사건은 공판에 부치고 안 부치는 것까지라도 말하지 안켓스니 여하간 여긔 대하야서는 절대로 말 아니할 터이니 속히 도라가라고 자못 자미롭지 못한 태도까지 가지게 되엿섯다.
『新聞□(신문□)를 買收(매수)
돈만 잇스면』
◇문 디주가 말햇다고
디주 측의 관계자 무안군(務安郡) 암태면岩泰面) 수곡리(水谷里) 문태현(文泰炫)(七八‧78) (디주 문재철의 부친) 문명호(文命鎬)(三七‧37) 문민순(文珉順)(二五‧25) 문응창(文應昌)(四○‧40) 문재봉(文在奉)(三○‧30) 다섯 사람도 역시 상해 급 소요죄로 공판에 부처 잇다는데 그중에 문명호와 문민순 두 사람만 구금이 되고 남저지 세 사람은 그대로 자유의 몸으로 잇스며 그 중의 수모자는 문태현인 모양 갓다는데 디주 문재철(文在喆) 씨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측 사람은 벌서 내여 노흘 수가 잇스나 만일 그러면 소작인 편의 면목이 업서서 그대로 구금 중에 두고 잇다 하며 지난 오월 십팔일에는 단고리(短庫里) 구장 김동련(金東連)의 집에서 그때 마참 경찰서 순사 장모까지 잇는 곳에서 공연하게 신문긔자 가튼 것도 돈만 잇스면 모다 매수할 수가 잇다고 팔을 뽑내며 도라다닌다더라.
文(문) 地主(지주)의 答辯(답변)
그런 말은 아니하얏다고
오후 네시 경에 긔자는 전긔 문재철(文在喆) 씨의 자택을 방문한즉 그는 『글세올시다. 지금 세상은 모다 돈 잇는 사람만 낫부다 하니까 어듸 내 말을 신용하겟슴니까마는 최초부터 그 사람들이 온순하게 요구를 하지 안코 위협수단으로 강제를 함으로 할 수 업시 오날 경우를 당하게 되엿는데 우리 측의 두 사람이 구금된 것에 대하야는 별로 변호사도 대일 필요도 업슴니다. 재판소에서도 곳 내여놀 터인데 만일 우리 측 사람만 내여 노흐면 저쪽 사람들이 불공편한 처분을 한다고 비난이 심할 것을 근심하야 공연히 두 달이나 너무 구금하여 두는 것은 재판소도 너무 가혹한 줄 암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이러니저러니 하고 도라 다닌다는 것은 멀정한 거짓말이외다. 나도 사람이지요.』
警戒(경계) 繼續(계속)
거리마다 경관
경찰서에는 요사이 다른 일은 도라볼 여유도 업시 사복형사를 느러노아 일반 군중 가운데 각 대표자를 가는 곳마다 조차다니며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복순사는 지난 팔일 밤부터 재판소 주위를 포위하고 그 부근 일대에는 아즉것 경계가 엄중한 모양이며 재판소 랑하(廊下) 정문에는 정복순사가 가장 위협스럽게 눈방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흙바닥에 업더저 잇는 일반 군중을 감시하고 들고나는 사람을 눈이 빠지도록 훌터보고 잇더라.
『騷擾罪(소요죄)?
어떠케 뎍용하는지
참말 모르겟소』
金(김) 辯護士(변호사) 談(담)
금번 열세 사람의 사건을 변호할 변호사 광주(光州) 서광설(徐光卨) 경성(京城) 김병로(金炳魯) 김용무(金用茂) 김태영(金泰榮) 목포(木浦) 김영수(金永洙) 씨 등 다섯 사람 중 하나인 김영수 씨는 말하되 『아즉 긔록(記錄)을 다 보지 못하엿스닛가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업슴니다. 엇재던 긔록이 이쳔여장이나 될뿐더러 『소요죄』라는 것은 얼마나한 범위 안에서 엇더케 적용하는지 참으로 나 역시 잘 리해할 수가 업슴니다. 하여간 내 생각에는 그 중 몃사람은 아마 무사하게 될 줄 암니다만은 모든 것은 그네들에게 달렷지요. 그리고 먼저부터 중촌(中村) 예심판사에게 뎨출하엿던 보석(保釋)청원은 지난번에 종결과 한 가지로 각하(却下)가 되엿슴으로 또 다시 지난 십일에 대우(大友)판사에게 보석청원을 새로히 뎨출하엿는데 이번에는 엇지 될는지 알 수 업슴니다』
『今番(금번)은 斷然(단연) 不歸(불귀)
우리의 목뎍을 달하지 안코는』
群衆(군중) 代表(대표) 某氏(모씨) 談(담)
륙백여명 군중 대표 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 일이 발생되여 열세 사람이 구금된 후로 거의 날마다 판검사들과 교섭하여 왓슴니다만은 아모 효력이 업시 오늘 이러한 경우를 당하게 되엇슴니다. 그동안 보석에 대하야도 예심판사는 항상 오늘 래일 미러 오다가 결국 지난번 예심종결이 될 때에 각하를 하여 바렷슴으로 우리는 이제 최후로 판사에게 청원을 하고 그 대답을 긔다리는 것뿐이외다. 우리의 요구는 무슨 그 열세 사람에게 향하야 죄가 잇느니 업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을 우선 보석(保釋)을 하여 달나는 것뿐이외다. 만일 오늘이나 래일에 명확한 대답이 업거나 또는 보석을 불허가하는 때에는 그때에 또다시 군중의 협의를 따라 일을 진행하겟스나 하여간 이번에는 결단코 그대로 도라가지 아니할 구든 결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인고로 장차 엇지 될는지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한 가지로 일반 군중은 오즉 참혹한 현상 이외에는 아모 반항도 폭행도 업시 양순한 무리들이외다. 일전에 좀 떠든 것은 흥분되엿든 까닭인가 함니다』하더라.
현대문
암태소작사건전후 경과의 상보
무안군 암태면 소작인 600여 명이 지난 8일부터 목포 광주지방법원 지청 구내에 몰려와 이번 소작쟁의로 말미암아 예심을 마치고 재판에 넘어가 있는 소작회 간부와 회원 13명을 풀어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현상은 이미 전날 지면에 보도하였다. 이제 그 자세한 전말 내용과 지켜본 사실을 기록한다. 지난 7일에 암태면 암태도 주민 일동은 그곳에 있는 소작인회 부인화 청년회 3개 단체가 연합하여 면민대회를 열고 구금 중에 있는 13명을 건져내겠다고 굳게 결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지난번에 사법관에게 속아 실패한 것을 경험삼아 어떻게 되었든지 최후의 해결을 얻자는 뜻으로 만약 이번에 13명과 같이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때는 우리는 그 법정 안에서 다 같이 굶어죽자는 굳을 결심으로 모두 걸음을 같이 하자고 약속하였다. 주민 600여 명은 늙은이와 젊은이의 구별도 없이 남자나 여자를 묻지 않고 누구다 모두 흥분해 즉시 10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그 다음날인 8일 밤 저물녘에 목포지청 구내에 살기가 가득한 야영을 하게 되었다.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으스름 달 아래
하룻밤을 새
이와 같이 불의의 변을 당하게 된 재판소에서는 어떠한 태도로 그들을 상대하였는가? 우선 지청장은 경찰서장과 협의하여 군중의 대표자 서광호 씨를 먼저 만나 일반 군중에게 빨리 돌아가는 것이 제일 나은 방안이라는 뜻을 말하였다. 그 다음에는 대표자 박복영 서광호 김정순 김상규 고백화 등 여러 사람을 만나 조금도 확실한 대답은 없이 역시 같은 뜻으로 여러분이 이곳에 공연히 머물고 있는 것은 일의 해결을 위하여 조금도 이익이 없으니 이 뜻을 군중에게 전하여 양해를 시켜달라고 간절하게 권고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나 말해도 군중은 여전히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므로 세 번째는 어쩔 수 없이 경찰서장으로부터 경비소를 개방하여 줄 테니 모두 그곳으로 돌아가서 오늘밤을 새우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이런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덮을 것 깔 것도 없이 땅을 요로 삼고 하늘로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에 작정한 마음으로 습기가 가득한 밤이슬을 맞으면서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린 두 뺨을 인정 없는 모기들에게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다음날인 9일을 맞게 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몰라』
질서를 어지럽히면
처리하겠다고
나카지마 목포서장의 말
다시 나카지만 경찰서장을 찾아가니
『나는 경성고등경찰계에 있다가 지난달 24일에 이곳에 새로 부임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처음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재판소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온건한 처분을 할 작정으로 보이며 이번 일로 인하여 특별히 군수나 법원장들이 모여서 무슨 회의를 한 일도 없습니다. 오직 경찰서에서는 재판소의 지휘를 따라서 그들을 처분하겠습니다마는 며칠 전부터 대표자들을 향하여 빨리 각기 돌아가라고 누누이 알려주었습니다. 만약 시내로 돌아다니며 밥을 구한다든지 어쩌느니 하여 질서를 어지럽힐 염려가 있는 때는 그저 둘 수 없으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므로 참 함부로 제재할 수도 없고 아주 딱한 노릇이올시다. 그리고 13명의 피고들은 처음부터 검사국으로 곧장 데려갔기 때문에 경찰서에는 조서 같은 것도 없습니다.』
굶주림, 두려움, 노여움
노인과 어린 부인 200여 명
굶은 엄마에게 매달린 어린 목숨
이처럼 불쌍한 모습과 참혹한 현상을 알아주는 자 없이 오직 그들 자신으로 위로할 뿐이었다. 600여 군중 가운데는 백발이 뒤덮인 70 노파와 어린아이를 안은 젊은 부인이 거의 200여 명이나 된다.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둘씩 셋씩 머리를 맞대고 신음하는 늙은이의 비애와 아무 것도 모르는, 천사 같은 어린 것들의 젖 달라는 울음, 정신이 씩씩한 젊은 사람들의 기운과 함께 어우러져 하염없는 인생의 비애로 한꺼번에 폭발되었다. 굶주린 창자를 힘없는 손으로 움켜잡고 8일부터 9일까지 이틀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몸을 잘 움직일 수 없게 힘이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암태면 단고리 박모 씨(50)는 기절하여 즉시 제중의원으로 실려 갔으며 이런 지경에 이르자 목포 시내의 뜻있는 청년들은 이러한 현상을 크게 걱정하였다.
우선 먹고 일을 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죽을 만들어 여러 번 강권하였으나 결국 노약자와 몇 사람 외에는 먹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 3분의 2는 그 다음날 오후 점심까지 만 3일 동안을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나 일행 중 노약자들은 억지로 권해 역시 입을 되는대로 축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 푼 돈이 없고 한 줌 쌀이 없는 그들은 장차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내갈는지 정말로 중대한 문제이다. 10일 오전에도 역시 경찰서장과 재판소에서 대표를 회견하고 오후에는 무안군수 김동우 씨가 자기 사택에서까지 대표들을 만나 보았지만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4일째 되는 11일 오전에는 제주에서 돌아왔다는 광주지방법원장과 수석판사들이 일반 군중에게 『오직 공명정대한 사법당국을 믿고 빨리 돌아가라』고 말하자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 땅 위에 엎드리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원장은 면회도 거절할뿐더러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오직 할 말이 있거든 광주로 오라고 하며 자동차를 몰아 돌아가 버렸다. 이리하여 목포에 도착한 후 4일 동안에 모두 4, 5차의 교섭이 있었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고 군중은 전과 다름없이 굶주림과 두려움, 노여움에 쌓여 있다.
판사, 성을 내
아무 말도 안할 테니 질문을 그치라고
이번 사건에 관계자인 무안군 암태면 기동리 서태석(40) 박홍원(35) 박응언(29) 서동수(25) 서창석(33) 소작회위원장 서민석(23) 김연태(37) 손학진(29) 등 8명과 같은 면 단고리에 거주하는 박필선(40) 박병완(40) 김운재(36) 박용산(38) 김문철(27) 등 모두 13명은 모두 예심 중에 있다가 지난 3일에 종결되고 모두 소요와 상해죄라는 혐의 아래 공판을 열게 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신도 검사, 나카무라 예심판사, 오토모 수석판사는 일절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중에도 오토모 판사는 무슨 이유인지 기자를 대할 때 펄쩍 화를 내면서 공연히 되지도 않는 말로 남의 사무실을 왜 들어오느냐 마느냐 말하였다. 이번 사건은 공판에 부치고 안부치는 것까지도 말하지 않겠으니 하여튼 그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말 않을 터이니 빨리 돌아가라고 자못 기분 나쁜 태도까지 보이게 되었다.
『신문을 매수』
돈만 있으면
◇문 지주가 말했다고
지주 측의 관계자인 무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태현(78‧지주 문재철의 부친) 문명호(37) 문민순(25) 문응창(40) 문재봉(30) 5명도 역시 상해와 소요죄로 공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그중에 문명호와 문민순 두 사람만 구금이 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대로 자유의 몸으로 있다. 그 중의 수모자는 문태현인 모양 같다는데 지주 문채철 씨는 항상 말하기를 우리 측 사람은 벌써 풀어 내보낼 수가 있지만 만일 그렇게 하면 소작인 편의 면목이 없어서 그대로 구금 상태에 있다고 한다. 지난 5월 18일에는 단고리 구장 김동련의 집에서 그때 마침 경찰서 순사 장모까지 있는 곳에서 숨김없이 신문기자 같은 것도 돈만 있으면 모두 매수할 수가 있다고 팔을 뽐내며 돌아다닌다고 한다.
문 지주의 답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오후 4시경에 기자는 위의 문재철 씨 자택을 방문하니 그는 『글쎄올시다. 지금 세상은 모두 돈 있는 사람만 나쁘다고 하니까 어디 내 말을 신용하겠습니까마는 처음부터 그 사람들이 온순하게 요구를 하지 않고 위협수단으로 강제를 하므로 할 수 없이 오늘 경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측 두 사람이 구금된 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변호사도 선임할 필요도 없습니다. 재판소에서도 곧 풀어줄 터인데 만일 우리 측 사람만 풀어주면 저쪽 사람들이 불공평한 처분을 한다고 비난이 심할까봐 걱정하여 공연히 두 달이나 너무 구금하여 두는 것은 재판소도 너무 가혹한 줄 압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이러니저러니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이외다. 나도 사람이지요.』
경계 계속
거리마다 경관
경찰서에는 요즘 다른 일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사복형사를 배치하여 일반 군중 가운데 각 대표자를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복순사는 지난 8일 밤부터 재판소 주의를 포위하고 그 부근 일대에는 아직까지 경계가 엄중한 모양이다. 재판소 복도 정문에는 정복순사가 가장 위협적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흙바닥에 엎어져 있는 일반 군중을 감시하고 오가는 사람을 눈이 빠지도록 훑어보고 있었다.
『소요죄?
어떻게 적용하는지
정말 모르겠소』
김 변호사의 말
이번 13명의 사건을 변호할 변호사인 광주 서광설, 경성 김병로, 김용무 김태영 목포 김영수 씨 등 5명 중 1명인 김영수 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직 기록을 다 보지 못하였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기록이 2000여 장이나 될뿐더러 「소요죄」라는 것은 얼마만한 범위 안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 정말이지 나 역시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내 생각에는 그중 몇 사람은 아마 무사하게 될 줄 압니다만 모든 것은 그들에게 달렸지요. 그리고 먼저부터 나카무라 예신판사에게 제출하였던 보석청원은 지난번에 종결과 함께 각하되었으므로 또 다시 지난 10일에 오토모 판사에게 보석청원을 새로 제출하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딜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은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군중 대표 모 씨의 말
600여 명 군중 대표 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 일이 발생하여 13명이 구금된 후로 거의 날마다 판검사들과 교섭하여 왔습니다만 아무 효력 없이 오늘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석에 대하여서도 예심판사는 항상 오늘 내일 미뤄 오다가 결국 지난번 예심이 종결될 때에 각하해버렸으므로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판사에게 청원을 하고 그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이외다. 우리의 요구는 무슨 그 13명을 향하여 조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은 우선 보석하여 달라는 것뿐이외다. 만일 오늘이나 내일 명확한 대답이 없거나 또는 보석을 허가하지 않을 때에는 또다시 군중의 협의에 따라 일을 진행하겠으나 하여간 이번에는 결코 그대로 돌아가지 않을 굳은 결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므로 장차 어떻게 될른지 참으로 한심합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일반 군중은 참혹한 현상 이외에는 아무 반항도 폭행도 없이 양순한 무리들이외다. 일전에 좀 떠든 것은 흥분되었던 까닭인가 합니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