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인물 이반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다수가 배부르고 행복하고 평화롭기 위해 한 아이가 고문을 당해 죽어야 한다면 그런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판타지문학의 거장 어슐러 르귄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그러한 실존적 상황을 펼쳐 보인다.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임은 물론이다.
소설의 배경은 행복으로 가득한 오멜라스라는 도시다. 기품 있는 건축물, 감동적인 음악, 화려한 축제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한 곳이다. 그런데 그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하는 “엄격하고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한 아이가 숨 막히는 지하실에서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에게 친절해서도 안 된다. 왜 그런 조건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그러한 실존 속으로 “내던져졌을” 따름이다.
창문도 없는 지저분한 지하실에 갇혀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이는 여섯 살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은 열 살이 다 되었다. 영양실조와 방치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오멜라스 시민들은 누구나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 직접 가서 확인한 사람도 있고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아이를 지하실에서 꺼내 씻기고 편하게 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번영과 아름다움, 기쁨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을 알면서도 방치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거다. 비록 소수지만 아이를 보고 그 “끔찍한 모순”에 진저리를 치며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