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지난달 30일 프랑스 파리의 레스토랑 ‘킨수‘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김치볶음밥, 파전을 만들고 있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이 레스토랑은 코로나19 봉쇄조치로 영업이 어려워지자 ‘한식 도시락‘ 메뉴를 내놔 호응을 얻고 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김윤종 파리 특파원
“봉쇄령으로 레스토랑을 닫으니 배달, 포장판매만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게 필요했어요. 한국 음식을 생각하게 됐죠.”
조리를 마친 보네 씨의 설명이다. 프랑스는 코로나19 1차 확산기인 지난해 3∼5월에 이어 2차 확산이 시작된 11월부터 현재까지 전국 모든 음식점이 폐쇄된 상태다. 폐쇄 조치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그는 김치볶음밥, 파전, 양념통닭 등을 도시락 메뉴로 내세웠다. 10여 년 동안 한국을 오가며 한식에 대한 레시피(조리법)를 연구한 그는 쇠고기 패티 대신 한국식 ‘동그랑땡’을 이용한 버거, 고추장과 토마토소스, 간장을 섞은 장(醬)을 만들어 파리 미식가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면역력 높이는 김치 섭취 증가
보네 씨는 “소화가 잘되고 면역력을 강화시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프랑스에서 한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김치도시락을 사러 온 직장인 카밀 씨(41)는 “발효음식이 면역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보도를 많이 봤다”고 했다.
실제 프랑스 주요 언론은 코로나19 대유행과 맞물려 ‘김치를 비롯한 한국 발효음식이 면역력에 좋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일간 르파리지앵은 “한국 발효음식은 코로나19 방어력을 강화시킨다”며 김치 레시피를 소개했다. 프랑스 유명 영양학자 장미셸 코엔 박사도 언론 인터뷰에서 “김치는 ‘전염병 시대의 강력한 건강 협력자’”라며 “유럽인 입맛에는 맵고 강한 맛의 김치가 익숙하지 않지만 건강을 위해 추천한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에서도 한식 조리법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증가하는 추세다. 요리법 소개로 유명한 프랑스인 유튜버이자 요리 작가인 에르베 팔미에리 씨(41)의 소셜미디어에 업로드된 고추장, 매실청, 김치 조리 콘텐츠는 조회수 100만 건이 넘었을 정도다. 김치나 불고기 등 한식을 만든 후 인증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파리 청년들도 많다.
프랑스 기업들은 ‘한식 현지화’에 나서고 있다. 프랑스 식품기업 레자르크뤼는 매운 고춧가루, 마늘, 젓갈을 줄이고 프랑스 남서부 누벨아키텐 지역 농산물인 순한 맛의 에스플레트 고추를 활용한 김치를 제품화해 인기를 끌고 있다.
수출 늘어나는 고추장 된장
한국 식품의 대(對)유럽 수출도 증가하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파리센터 집계 결과 프랑스를 포함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10개국의 한국산 김치 수입 물량은 2016년 1340t(495만2000달러)에서 지난해 2791t(1177만8000달러)으로 4년간 2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고추장 수입액도 같은 기간 90.3% 늘었다. 된장, 참기름, 고춧가루, 쌈장 등도 같은 기간 판매가 최대 50% 급증했다.
봉쇄령 속 한식 도시락 인기
파리 6구의 비빔밥 레스토랑 피에르상 엑스프레스. 점심 도시락을 사려고 직장인들이 줄을 서있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지난달 30일 정오. 기자가 찾은 파리 뤽상부르 공원 인근의 한 식당에서는 7, 8명이 줄을 서서 도시락을 구매했다. 이곳은 요리 경연 TV 프로그램에서 준우승을 해 유명해진 한국계 프랑스인 스타 셰프 피에르 상 부아예 씨(41)가 운영하는 비빔밥 전문점이다. 20, 30대 파리 직장인들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발음으로 ‘비빔밥 비앙드(Bibimbap Viande·쇠고기 비빔밥)’를 주문했다.
종이로 된 도시락 속에는 나물 대신 다양한 생야채와 볶은 고기, 버섯, 프랑스인 입맛에 맞춘 쌈장 등으로 만든 비빔밥이 들어 있었다. 이 비빔밥 도시락은 배달 애플리케이션(앱) 등을 통해 하루 최대 3500개가 판매된다. 비빔밥을 2개 주문한 30대 직장인 올리비에 씨는 “봉쇄령으로 일상이 단조롭다 보니 식사라도 프랑스 음식이 아닌 색다른 무언가를 먹자는 분위기”라며 “한국 식당에서 자주 테이크아웃을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 범주 넘어 독자 위상
이런 흐름 속에서 유럽 내 간편식 시장은 2024년 300억 유로(약 40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중 한식이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프랑스 식품 전문가들도 “그간 유럽인에게 중국, 일본, 태국 정도를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요리는 ‘아시아 음식’으로 뭉뚱그려졌다”며 “그러나 이제 한식은 독립적인 외국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류 드라마, 음악, 영화 같은 한국 대중문화의 유럽 내 인기도 한식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극장, 공연장 등이 문을 닫다 보니 넷플릭스, 왓챠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가정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유럽 인구는 1억 명이 넘는다. 유럽 내 서비스 중인 OTT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 순위 상위권에 오르면서 콘텐츠 속에 등장하는 한식에 궁금증을 느끼는 20, 30대가 많다. 파리 16구에 사는 대학생 가브리엘 씨(23)는 “그룹 ‘블랙핑크’가 나오는 먹방, 한국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 나오는 한국 수프(찌개)를 본 후 친구들과 함께 먹어봤다. 너무 매웠지만 중독성 있는 맛”이라고 말했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