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13>나뭇잎 위에 쓴 시
영화 ‘유브 갓 메일’에서 조 폭스(왼쪽)와 캐슬린 켈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모른 채 PC통신 메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간다. 워너브러더스 제공
당나라 천보(天寶·현종 때의 세 번째 연호로 742∼756년) 연간의 어느 봄날, 고황(顧況·727?∼816?)은 우연히 어원(御苑·궁궐의 후원)의 물길을 따라 떠내려 온 오동잎을 주웠다. 잎사귀엔 시가 적혀 있었다. “한번 구중궁궐로 들어온 뒤, 해마다 봄조차 보지 못했어요. 겨우 나뭇잎 하나에 시를 적어, 다정한 사람에게 부쳐 보아요(一入深宮裡, 年年不見春. 聊題一片葉, 寄與有情人).” 궁녀의 시에 마음이 동한 고황은 다음 날 나뭇잎에 시를 써서 물 위에 띄웠다.
10여 일 뒤 고황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잎사귀에 적힌 궁녀의 답시를 받게 된다. “나뭇잎 하나에 적은 시 구중궁궐 나가더니, 뉘라서 외로운 이내 맘에 화답해 주셨나. 서글퍼라, 봄 되자 마음대로 둥실 떠가는 물속 나뭇잎만도 못한 내 신세(一葉題詩出禁城, 誰人酬和獨含情. 自嗟不及波中葉, 蕩양乘春取次行).”
둘이 주고받은 시에는 궁궐에 갇혀 봄날도 누릴 수 없는 궁녀와 그녀를 동정하는 시인 간의 애틋한 교감이 담겨 있다. 고황의 시에서 지는 꽃과 꾀꼬리의 슬픔은 꽃다운 시절을 허송하는 궁녀의 구슬픈 처지를 대변한다.
노라 에프론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유브 갓 메일’(1998년)도 상대를 모른 채 마음을 주고받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형서점 경영자 조 폭스와 동네서점 주인 캐슬린 켈리는 PC통신 메일을 통해 고민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간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먼저 알게 된 조는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새로 연 대형서점으로 인해 캐슬린이 서점 문을 닫게 됐기 때문이다. 영화는 화해와 사랑으로 마무리된다.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진 겨울이 지나고 맞은 올봄. 봄조차 누릴 수 없던 가련한 궁녀와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시인의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위안을 받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볼 때처럼 근심을 잠시 잊고 미소 지어도 좋겠다. 비록 사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