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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길, 메이지유신의 길[박훈 한일 역사의 갈림길]

입력 | 2021-04-02 03:00:00


1860년 베이징을 점령한 서양 군대는 청나라 황실의 정원인 원명원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조선에도 큰 충격을 줬다. 사진 출처 단파겔러닷컴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1860년 무렵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획기적인 시기였다. 흔히 아편전쟁을 중시하지만 사실 그 영향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서양 열강은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중국과의 무역이 영 성에 차지 않았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애로우호 사건을 구실로 중국에 난입하여 1860년 베이징을 함락했다. 청 제국 성립 이후 처음 있는 변고였다. 황제 함풍제는 열하(승덕)로 피란 갔다. 수도가 떨어지고 황제가 도망갔으니 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엉덩이가 무겁던 청 제국도 마침내 서양화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양무운동이다.》

에도 막부 말기인 1864년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가 시모노세키 전쟁을 통해 조슈번 포대를 점령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1854년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와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지만 무역개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초대 미국 영사 해리스는 청과 서양열강 간의 긴장상태를 이용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청을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으로 쳐들어올 거라며 미국과 미리 통상조약을 맺어두면 든든한 방패가 될 거라고, 막부를 협박하고 설득했다. 막부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통상 찬성파는 이 상황을 이용해 일거에 통상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1858년 여름이었다.

日 도쿠가와 막부, 美와 통상조약


청과 일본이 서양화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을 때 조선은 어땠나. 강화도령 철종을 세워두고 안동김씨가 집권하던 때였다. 베이징 함락은 조선에도 크나큰 충격이었다. 저 거대한 대청제국을 무너뜨린 서양의 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862년 유례없는 대민란이 삼남을 휩쓸었다. 60년 세도정치에 대한 파산선고였다. 문자 그대로 외우내환이었다. 때마침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이 집권했다. 양력으로 1864년 벽두였다.

한국근대사에서 권력의지와 정치역량으로 볼 때 이하응을 능가할 인물을 찾긴 힘들 것이다. 1820년생이었으니 40대 중반, 한창 나이에 권좌에 올랐다. 그는 사상 최초로 왕의 생부가 아직 생존해 있는 ‘살아있는 대원군’이었다. 아들 고종이 11세였으니 권력은 그의 것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그 후 10년간 감행한 개혁은 실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빼어난 능력, 외우내환의 위기의식 없이는 생각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먼저 전국 서원 대부분을 철폐했다. 유림의 근거지 서원을 없애는 일은 거칠게 비유하자면 중세유럽에서 교회를, 혹은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 절을 문 닫게 하는 일과 진배없었다. 정신적 비중으로 치자면 지금의 명동성당을 넘어설 만동묘를 한방에 날렸다. 송시열의 뜻에 따라 명나라의 황제를 제사 지내려고 세운 곳이다. 한술 더 떠 양반에게는 군포(軍布)도 매겼다. 기세등등한 혁명적 조치에 양반세력은 제대로 저항해 보지도 못했다. 조선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국가권력이 약했던 걸로 평가된다. 국가권력은 양반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그들을 뚫고 사회기층을 장악하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의 정책은 조선왕조에서 드문 국가주의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美-佛-러와 접촉 나선 대원군


흥선대원군

대원군은 국방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선은 세계 최강국 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처지였으니, 핵무기 같은 비대칭전력이 없는 한 빈약한 재정에서 국방비를 증액한들 거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이미 유목세계와 중원세계를 통합하여 거대한 제국을 구축한 청 앞에서 군사력 강화는 현실적 의미를 갖기는커녕 괜히 청의 의심과 내부 불만만을 살 것이었다. 팍스 시니카(Pax Sinica·청에 의한 평화) 질서를 철저히 따르는 것, 즉 사대주의 외교노선은 이런 상황과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압록강이 아니라 해상방비로 안보환경이 바뀌자 대원군은 강화도 무장에 나섰다. 그의 집권기에 강화도 방비는 꽤 진전되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의 선전은 그 결과다.

문제는 대외정책이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과 척화비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움직임도 감지된다. 그는 국내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도움을 받으려고 시도했다. 부국강병의 절박함을 이해하고 있던 데다가 부인이 천주교도여서인지 서학에 대해 그는 히스테리적이지만은 않았다. 연해주를 설치하여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된 러시아와는 지방관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다. 미국과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수차례 교섭을 벌였다. 이 때문에 일찍 작고한 한국사학자 연갑수는 대원군 시기의 외교경험이, 민씨 정권이 서구열강과 조약을 맺을 때 밑바탕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모험적인 외교시도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두 차례의 전쟁은 배외주의를 한층 고양시켰다. 위정척사파들이 전면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이런 여론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패한 日, 부국강병에 매진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대원군 집권 약 5년 전 막부는 서양 각국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여기서도 강력한 배외주의가 등장했다. 이른바 존왕양이(尊王攘夷·천황을 받들어 오랑캐를 몰아내자) 운동이다. 막부가 이를 탄압하고 나서는 과정에서 막부 수반 이이 나오스케가 백주대낮에 암살당했다. 병인양요 전에 일본도 마찬가지로 서양과 전투를 치렀다. 1863년 영국은 사쓰마번을, 1864년 서양연합군은 조슈번을 초토화시켰다. 척화와 양이를 부르짖던 이들은 즉각 서양과 화해하고 대신 부국강병에 매진했다. 막부는 서양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군비증강에 진력했다.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한 때는 일본에서는 막부와 반막부파(사쓰마번, 조슈번)가 부국강병과 근대화경쟁에 나서기 시작한 해였다. 누가 이겨도 일본의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부국강병과 서양화로. 4년 후 메이지유신이 발발했다.

조선, 정치리더십 잃고 사분오열


대원군은 집권 10년 만인 1873년 실각했다. 그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한계였다. 배후조종은 언제나 위험하고 한계가 있다. 그를 대신한 고종과 민씨 정권은 힘겹게 노력했지만 대원군 같은 강력한 정치리더십이 없었다. 그 후로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만한 강력한 지도자는 나오지 않았다. 리더십은커녕 6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조선의 정치리더십은 철저히 분열했다. 수구파와 개화파 간에,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 간에, 급진개화파 서로 간에 마치 핵분열이라도 하는 듯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대원군 같은 지도력과 김옥균 같은 정책이 결합하는, 볼 만한 장면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