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말고’ 아닌 ‘국정 철학’ 가진 지도자 필요
3월 25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열린 ‘누리호 종합연소시험 참관 및 대한민국 우주전략 보고회’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동아DB]
새해 첫날인 2021년 1월 1일 정국은 갑작스러운 사면론에 요동쳤다. 진원지는 이낙연 당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표. 그는 신년 인터뷰에서 적절한 시기가 오면 대통령에게 이명박, 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이 전 대통령은 형이 확정된 터라 특별사면이 가능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재판이 진행 중이어서 사면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이 전 대표는 “형 집행 정지라는 것도 있다”며 사면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사람들은 이 전 대표가 확실한 대선후보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 차원에서 이런 주장을 했으리라고 추측했다. 대선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는 상황이니, 사면 건의를 통해 영남에서 지지율을 올리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충수가 됐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조사한 결과 사면 찬성은 47.7%, 반대는 48.0%로 비슷했지만, 지지 정당이 어디냐에 따라 여론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찬성이 81.4%가 나온 반면,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반대가 88.8%나 됐다. 특히 전체 반대 48.0% 중 ‘매우 반대’가 35.6%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여론 의식해 번복 일삼아
1월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이낙연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그의 뒤편에서 광주 시민단체들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사면 파동은 문 대통령의 한마디로 종결됐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사면에 대한 질문이 나왔을 때 문 대통령은 “지금은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국정농단으로 국민의 실망이 크고, 당사자가 반성조차 없는지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대통령의 설명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전 대표가 괜한 짓을 해 대권가도에서 이탈할 위기에 처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이상한 점이 있다. 원래 이 전 대표는 눈치만 보고 행동을 안 하는 스타일이다. 매사를 엄중히 지켜보기만 해서 ‘엄중낙연’이라는 별명까지 붙지 않았나. 게다가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아무리 이 전 대표가 대통령에게 사면을 건의하는 형식이었다 해도, 대통령 처지에서는 월권행위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일각에선 이 전 대표가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3월 26일 한 언론이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를 냈다. 이 전 대표가 고위 공직자 P씨와 전직 대통령 사면론에 대한 의견을 조율한 뒤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전 대표 측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인 국민의힘 이재오 상임고문에게 “전직 대통령 가족에게 이야기해도 좋다”는 말까지 전했다고 한다. 친문 반대에 부딪혀 이를 뒤집긴 했지만, 사전에 교감한 건 맞다는 얘기다.
의사파업이 끝나가던 지난해 9월 2일 문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글을 남겼다. 그는 간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렵나.” 이는 곧 비판의 대상이 됐다. 의사와 간호사의 역할이 엄연히 다른 데다, 코로나19 정국에서 의사를 적으로 돌리고 간호사와 갈라치기하는 행태가 좀스럽고 민망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 발생했다. 소위 갈라치기 게시물이 비판을 받자 청와대는 해당 글을 쓴 이가 대통령이 아니라 기획비서관이라고 밝혔다. 이는 SNS 게시물은 대통령이 직접 쓴다는 그간의 설명과 180도 다른 얘기였다. 사람들은 문 대통령이 특유의 ‘간보기’ 기술을 선보였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의 간보기는 이것만이 아니다. 비싼 돈 들여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만들어놓고선 국민이 연금 납부액을 올리는 것에 반발하자 자신의 전매특허인 ‘격노’를 시전해 원점으로 돌렸다. 또 양도소득세 완화 얘기를 꺼냈다 논란이 되자 “검토한 바 없다”고 밝혔다. 담뱃값 인상 얘기도 마찬가지다.
국정 철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행태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야당 시절 국회의원을 40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했다 논란이 되자 “장난스럽게 한 얘기”라고 한 사건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간보기의 극치다. 사정이 이러니 두 전직 대통령 사면 주장과 관련해서도 “문 대통령이 간보기를 했다”고 의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대체 왜 이런 간보기가 일상이 된 것일까. 대통령에게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여론이 좀 불리하더라도 밀고 나가는 게 대통령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런 게 없다 보니 오로지 지지율에만 매달리고, 중요한 사안마저 여론의 눈치를 보게 됐다.
서민은… 제도권 밖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로운 입담으로 풀어낸다. 1967년생. 서울대 의대 의학과 졸업. 서울대 의학박사(기생충학). 단국대 의대 기생충학교실 교수. 저서로는 ‘서민독서’ ‘서민 교수의 의학 세계사’ ‘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서민적 글쓰기’ 등이 있다.
서민 단국대 의대 기생충학교실 교수 bbbenji@naver.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83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