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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FDR도 LBJ도 아니지만…” 역사학도 바이든의 말, 무슨 뜻?[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입력 | 2021-04-06 14:00:00


‘역사 열공 모드.’

요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 대해 이런 평가가 나옵니다. 요즘 워싱턴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마련한 역사 스터디모임이 화제입니다. 지난달 초 비공개로 열렸던 역사학자들과의 회동이 바로 그것이죠.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마련한 역사공부 모임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대통령과 함께 화제에 오른 린든 존슨 전 대통령. 취임 다음해인 1964년 동북부 낙후 지역을 방문했을 때 주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 뉴욕타임스


임기 초 바쁜 대통령이 대면 모임을 거의 갖지 않는 백악관에서 2시간 동안 마스크를 쓰고 만난 것을 보면 대단한 행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모임에서 ‘학생’ 바이든은 역사학자들이 풀어주는 역대 대통령 강의를 노트에 받아 적어가며 열심히 경청했다고 합니다. 백악관 스태프들이 일일이 음료를 서빙하는 것도 방해가 될까봐 아예 다과 테이블을 한쪽에 마련해 놓고 참석자들이 가져다 먹으면서 공부 삼매경 분위기였다고 하죠. 이 자리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서들이 다수 출간된 저명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 마이클 베슐로스를 비롯해 아넷 고든 리드 하버드대 교수, 에디 글라우드 주니어 프린스턴대 교수, 조앤 프리먼 예일대 교수, ‘스티브 잡스’ 전기로 유명한 월터 아이작슨 아스펜연구소 회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보인 바이든 대통령의 질문은 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린든 존슨 등 2명의 전임 대통령에게 집중됐습니다. 민주당 출신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통령에 올랐다는 점이 바이든 대통령과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단발성 정책이 아닌 긴 안목의 시대정신을 제시한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루즈벨트 전 대통령은 경제에 대한 정부 개입, 의회의 대통령 권한 최대 보장을 골자로 하는 ‘뉴딜’로 대공황을 이겨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롤모델로 유명하죠. 존슨 전 대통령 역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사망 후 혼란기에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라는 과감한 복지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입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의 정책 추진 속도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개혁적 아이디어가 부딪히기 쉬운 사회적 저항을 덜 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속도를 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2명의 전임 대통령에게서 찾으려는 것이지요.

“나는 FDR(루즈벨트 대통령의 약칭)도, LBJ(존슨 대통령의 약칭)도 아니야. 하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역사학자들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아달라고 질문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이 한마디를 꼽았습니다. “나는 FDR, LBJ와는 다른 나만의 아이디어와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바이든 대통령의 고민은 대략 이런 것이겠죠.

바이든 대통령의 역사공부 모임 참석자 중 한 명인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왼쪽).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이나 라이벌로 내각을 구성했다는 내용의 책 ‘팀 오브 라이벌스’(오른쪽)의 저자로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이 말 속에는 단임 대통령으로서의 실적 부담감이 담겨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4년 재선 도전 여부에 대해 아직 확실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최고령 대통령으로서 그의 나이에 대한 다양한 조롱이 나도는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4년 후 80대 나이의 대통령을 뽑아줄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반면 극도의 혼란기였던 도널드 트럼프 시대와의 결별, 코로나19 등 바이든 대통령이 부딪힌 문제는 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난제들을 해결하려면 역사의 교훈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처럼 ‘꿈’을 외치는 이상주의 리더십이 아닌 정치의 생리를 아는 노련한 협상가 출신 대통령인 만큼 전임자들의 실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바이든식 생존 비결이라고 할 수 있죠.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열린 첫 기자회견에서도 역사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긴 호흡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이슈를 바라봐야 한다”는 식으로 답했죠. 첫 질문자로 나선 AP통신 기자가 최근 미국-멕시코 국경을 물밀 듯 넘어오는 어린이 난민 문제에 대해 묻자 바이든 대통령은 “장기적인 문제다. 이민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고 답했습니다.

PBS 기자가 현재 의회에서 밀고 당기기 중인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규칙 개정에 대해 묻자 “내가 처음 상원의원이 됐던 120년 전부터 정치권의 논란거리였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많은 나이(79세)를 농담으로 삼은 것이지요. 그러면서 “1917년부터 1971년까지 58차례의 필리버스터 제한 시도가 있었다. 의원들은 기절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다른 의원들의 마라톤 발언을 들어야 하는 고충을 호소했다. 문제가 심각하다….” 이런 식의 답변이었습니다. 해당 이슈에 대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길게 이어진 반면 정작 기자들이 원하는 현재 정책 대응방향이나 당내 추진상황에 대한 답변은 거의 생략됐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65일 만에 열린 첫 기자회견 모습. 거리두기 원칙 때문에 10~15명의 기자만 참석했다. ABC방송


재선 도전에 관한 질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스(Yes)냐 노(No)냐’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역사로 화제를 돌립니다. “당신 자식이나 손자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논문을 쓸 것이다. 단지 중국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 기술 환경의 변화에 우리는 잘 적응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민주주의와 독재주의가 대결하는 시대다. 우리는 과연 조상이 물려준 민주주의의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는가….”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독재와 자신의 민주주의 시대를 비교하고 싶었던 듯하지만 재선 도전 여부에 대한 답변은 아니었죠. 그래서 바이든의 첫 기자회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립니다. “보기 드문, 철학적인 대통령 회견이었다”는 의견과 “도통 무슨 얘기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주장이 맞섭니다.

역사학자 모임, 기자회견 등에서 보여준 역사학도로서의 바이든 대통령의 면모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트럼프 전 대통령에 비해 바이든 대통령이 보여준 해박한 역사 지식에 국민들은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한가해 보인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역사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면 “위대한 리더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기 위한 재창조 작업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나는 역사를 다시 쓰려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역사에 매진하는 이유야 어찌됐던 간에 우리나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역사탐구 정신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북한 핵미사일,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주둔 등의 이슈를 두고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 미국 역사를 거론하며 이해력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전략이겠죠. 바이든 대통령은 얼마나 역사공부에 푹 빠졌는지 역사학자들과의 2시간 회동이 끝난 뒤의 아쉬움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2시간은 내쳐 더 할 수 있었는데(I could have gone another two hours)….”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