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테일러, 경성 ‘딜쿠샤’에 거주 독립운동 돕다 일제에 추방당해, 최지혜 국민대 교수가 복원 맡아 서울시가 지난달부터 일반 공개… 창덕궁 대조전-희정당도 작업중 “사람 손길서 멀어지면 죽은 공간 돼”
서울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 2층 거실에서 만난 최지혜 교수(위쪽 사진). 테일러 부부가 남긴 흑백사진(아래쪽 사진)을 기반으로 이곳을 재현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혜화1117 제공
서울 종로구 송월길의 고갯길을 10분 정도 오르자 붉은색 2층 벽돌집이 툭 튀어나온다. 주변의 잿빛 연립주택과 비교하면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 1층 거실에 들어서자 건물 벽과 같은 색의 벽돌로 만든 벽난로가 놓여 있다. 난로 위에는 중세 유럽풍의 은촛대와 은제 컵이 놓여 있다. 벽면에는 세 마리의 칼새가 그려진 방패 모양의 휘장이 걸렸다. 흡사 유럽 성에 온 것 같다.
분위기는 2층에서 바뀐다. 거실에는 연꽃과 오리, 새를 채색 자수로 장식한 2m 높이의 조선시대 전통 병풍이 놓여 있다. 동서양의 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곳은 미국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가 1923년에 지은 자택 ‘딜쿠샤’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구한말 부친을 따라 조선에 온 테일러는 1919년 3·1 독립선언서를 일제의 눈을 피해 세계에 알린 주인공이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서울시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테일러가 추방된 후 방치된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해 지난달 1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딜쿠샤 1층 벽에 있는 시계(위쪽 아래)는 집주인 메리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여성을 찍은 사진(아래쪽 아래)을 참고해 영국 옥스퍼드 근처 시골의 작은 골동품 가게에서 비슷한 모양의 시계를 수입해 왔다. 혜화1117 제공
최 교수는 복원을 마친 실내 공간을 “마치 흑백이 컬러로, 평면이 입체로 되살아난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실내 복원의 매력에 눈뜬 건 우연이었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4학년 재학 시절 했던 번역 아르바이트가 계기가 됐다. 고(古)악기를 수입·판매하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사장이 영국을 들를 때마다 경매회사의 도록을 가져왔다. “미술품이나 가구가 경매로 거래된다는 걸 도록으로 처음 알게 됐는데 재밌는 거예요. 사장님이 제게 영국에 있는 미술전문 대학원 ‘소더비 인스티튜트(Sotheby‘s Institute)’에 보내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199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 뒤 회사가 경영 악화로 문을 닫아 학비 지원이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 유학에 반대하는 가족에게 그는 “딱 한 학기 등록만 도와 달라”고 설득했고, 이후 전액 장학금을 받아 장식미술사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때 본 영국의 수많은 하우스 뮤지엄(박물관으로 만들어진 집)은 그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됐다. 귀국한 뒤 장식미술사를 다룬 ‘앤틱가구 이야기’(호미)를 2005년 발간했다. 이 책을 본 박물관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덕수궁 석조전 실내 공간 복원을 맡게 됐다.
그가 네 번째로 복원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건축물은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이다. 두 곳은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집무실로 쓰였다. 그는 “복원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