車시장 회복 예상 못하고 車반도체 물량 줄여
“지금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이 꽉 찼어요. 더 넣을 데가 없어요. 전시 상황입니다.”
8일 국내 한 중견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반도체 팹 짓는 게 무슨 식당 늘리는 것처럼 프라이팬 사다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다들 여력이 없으니 최소 내년까지는 지금 같은 부족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들 차량용 반도체 업체는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인텔 등에 밀려 45nm(나노미터) 이상 중·저사양 반도체와 센서, 다이오드 시장을 나눠 가졌다. 차량용 반도체는 이에 해당한다. 점유율은 미미하지만 국내에도 DB하이텍, 온세미컨덕터코리아, 삼성전자(기흥사업장)가 이런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연간 1조 개씩 생산되는 반도체가 왜 부족해진 것일까.
원인① 수요 예측의 실패
A반도체사 관계자는 “전력반도체는 스마트폰에 들어가면 스마트폰용이 되는 거고, 차량에 들어가면 차량용이 되는 것”이라며 “라인 자체가 크게 다르진 않고 세부적인 조건이나 품질 테스트 방식 등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력반도체는 50∼60도 선에서 열처리를 한다면 차량의 경우엔 150∼200도에서 열처리를 한다. 일부 장비들을 바꾸거나 새로 들이면 생산 품목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지난해 말부터 코로나19 확산 고점(피크)을 넘으며 글로벌 차량 수요가 회복되면서 불거졌다. 완성차 업체마다 반도체 재고가 떨어져갔지만 NXP를 비롯한 주요 반도체 회사는 이미 폭증한 IT 업계의 수요를 맞추느라 생산 라인이 꽉 찬 상태였다.
반도체 업체들 입장에선 최소 내년까진 상황의 획기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B반도체사 관계자는 “팹이 꽉 찬 상태에서 현재 돌리고 있는 IT 물량을 빼고 차량 물량을 넣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미 받아놓은 주문을 우선 처리해야 하고 수년 간의 애프터서비스(AS) 기간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인② 반도체 패권 경쟁으로 인한 ‘패닉바잉’
지난해 9월 당시 중국 1위 스마트폰 기업이자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었던 화웨이가 대만으로 전세기를 띄웠다는 소식이 외신으로 전해졌다. 미국 정부가 우방국들과 함께 화웨이 대상 반도체 수출 금지를 선포하자 재고 확보에 나선 것이었다.
올해 들어선 조 바이든 정부도 중국에 대한 반도체 견제의 시그널이 여전하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 이어 바이든 정부도 반도체를 국가 핵심 전략 요소로 설정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요 기업이 재고 축적에 나서며 수요가 뻥튀기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원인③ 자연재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 초부터 반도체 사업장과 생산기지가 있는 지역에 자연재해가 잇따르며 반도체 공급은 더욱 차질을 빚었다.
2월엔 북극발(發) 이상한파가 들이닥쳐 미국 텍사스의 NXP, 인피니온, 삼성전자 공장이 가동을 일시 중단했다. 3월엔 일본 르네사스 공장에 화재가 발생해 설비 일부가 피해를 입었다. 같은 달 대만에서는 가뭄이 문제다. 가뭄이 지속될 경우 TSMC 생산시설에 여파가 미칠지 주목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 번 웨이퍼(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얇은 원판) 작업에 들어가면 수 개월간의 미세공정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어져야 하는 게 반도체 공장의 특성”이라며 “정전이나 화재 등이 발생하면 공장이 실제 멈추는 시간은 짧지만 그로 인해 사실상 앞뒤로 수 개월간의 생산 공정이 무효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