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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마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해보세요.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 2021-04-11 09:00:00

결국 자택에서 임종한 ‘오싱’ 작가가 던진 화두, 안락사
“90 넘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젠 안녕’이라 말할 권리도 없나”
한국에서도 급증하는 ‘웰다잉’ 의향 등록




1980년대를 풍미한 일본 드라마 ‘오싱’의 작가 하시다 스가코(橋田壽賀子) 씨가 지난 4일 만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25년 5월생인 그는 2016년 ‘나는 안락사로 가고 싶다’는 글을 유명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 기고해 큰 파장을 불렀던 인물이다. 기고에서 그는 스위스의 안락사 사례 등을 들며 일본에서도 안락사가 허용됐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문예춘추사가 1년간 독자투고가 가장 많은 기사에 주는 ‘문예춘추 독자상’을 받았을 정도였다. 죽음을 논하는 것이 금기시돼온 일본에서 관련 논의와 연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하시다 스가코 씨는 90대에도 TV드라마 각본을 쓰며 현역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91세 때 ‘나는 안락사로 죽고 싶다’ 기고로 파문…사회적 논쟁 벌어져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하시다 씨는 올해 2월 하순부터 급성 림프종 치료를 위해 도쿄의 병원에 입원했다. 3월에 자택 근처인 시즈오카 현 아타미의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이어갔고 4월 3일 자택으로 옮겨 4일 세상을 떠났다. 임종은 인근에 살던 그의 드라마의 단골 출연자 이즈미 핀코 씨가 지켰다고 한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장례는 치르지 않았고 5일 화장돼 안장됐다.

하시다 씨는 평소 입버릇처럼 자신의 부고를 매스컴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의 사망소식은 하루 뒤 미디어에 알려졌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인터넷 기사에는 동시대를 함께 헤쳐왔음직한 독자들의 명복을 비는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내 심장이 멎어도 구급차는 부르지 말아 달라”

당초 그가 원했던 것은 일본에서의 안락사였지만 현실의 벽은 두터웠다. 개인적으로 스위스로 가는 방안도 모색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쿄특파원 시절이던 2018년 3월 그를 인터뷰했는데 “스위스에서의 안락사는 포기했다”며 “대신 자택에서 편안한 임종을 도와주는 의사를 만나 세상을 뜨고 싶다”고 했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안락사 가까운 존엄사’다. 주변에는 “내 입으로 밥을 못 먹게 되거든 음식을 잘게 부수거나 갈아서 먹이지 말아 달라, 심장이 멎어도 구급차를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하곤 했다.

하시다 씨를 만나기 전 인터뷰 신청 자체를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신문기사를 통해 죽음을 논한다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그런 망설임이 기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이 하시다 씨의 안락사론에 강한 공감을 표하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내가 나일 수 있을 때라는 말이 뼛속 깊이 다가온다”거나 “안락사라는 보험이 있다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글들이 그랬다.



▶하시다 스가코 인터뷰 “남에게 폐 끼치기 전, 죽는 방법 정도는 스스로 고를 수 있어야”


○소수의 나라, 지역만이 적극적 안락사 허용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뉜다.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한국식 존엄사는 큰 틀에서 보자면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해외에는 적극적으로 의사의 도움으로 약물을 주입해 죽음을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를 도입한 나라들도 있다.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미국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워싱턴 등 일부 주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외국인의 안락사를 지원하는 곳은 스위스가 유일한데, 디그니타스(DIGNITAS)를 비롯해 3개 단체가 활동 중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문예춘추사는 하시다 씨의 기고를 실은 4개월 뒤 사회 원로급 저명인사들을 대상으로 실명 설문조사를 실시해 특집(2017년 3월호)으로 실었다. 응답자 60명 중 33명이 ‘적극적 안락사’에, 20명이 ‘존엄사에 한해’ 찬성했다. ‘안락사 존엄사 모두 반대’는 4명에 불과했다. 고령자일수록 안락사에 찬성하는 비중이 높았다. 이들은 질문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답을 하고 있었다.

‘안락사 찬성’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 둘째는 “주변에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존엄사만 찬성’하는 이유로는 “연명을 원치 않는 것과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는 답변이 많았다. ‘모두 반대’하는 이유는 “죽음이란 모든 생물에게 자연의 섭리이니 인위적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017년 하시다 씨가 펴낸 ‘안락사로 죽게 해주세요’는 한국에도 번역본(‘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이 나와 있다. 책 표지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죽는 방법과 시기 정도는 스스로 정하고 싶다’는 그의 주장이 쓰여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어떻게 살 것이냐”

‘어떻게 죽을 것이냐’는 결국 ‘삶의 질’ 문제가 된다. 하시다 씨에게서 배운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권리가 내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긍정이자 마지막 순간까지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는 일이라는 것. 가령 스위스의 안락사 조력단체 디그니타스는 등록 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롭지만, 막상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회원이 된 뒤 안락사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3%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선택지를 찾는 겁니다. 안락사 허가는 안심을 확보하는, 마음의 보험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누구나 불안해지죠. 여차할 경우 이런 선택지가 있다는 걸 생각하며 더 열심히 삶에 임하게 되는 것 아닐지요.”(하시다 스가코)

그러고보면 사고로 장애를 입은 데다 잠시도 그치지 않는 통증을 얻게 된 젊은이가 가까스로 안락사 허가를 받은 뒤 오히려 자신의 현 상황을 긍정하고 장애인 올림픽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는 글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생전에 많은 명예와 인기를 누렸던 하시다 씨는 세상과 결별하는 순간 본인의 뜻을 관철했던 것일까. 이런 하시다 씨의 생전 권고가 의미심장했다. “매년 자신의 생일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지 한번씩 생각해보세요.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일본에서 시청률 기록을 세운 오싱은 세계 60여개국에서 방영됐고 한국판 영화로도 제작됐다. 일본 오싱 포스터(왼쪽)와 김민희가 주인공을 맡은 한국판 오싱 포스터




○NHK드라마 ‘오싱’으로 최고시청률 62.9% 기록한 인기작가

그의 대표작은 일본 공영방송 NHK가 1983년 4월부터 1년간 방영한 아침 드라마 ‘오싱’. 가난한 농촌 출신 여성이 기업을 일궈내는 과정을 그려내 최고 시청률 62.9%를 기록했다. 아시아와 중동 등 세계 60여 개국에서 방영됐고 한국판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는 2019년까지도 현역작가로 일했다. 1990년 시작된 TV드라마 ‘세상살이 원수천지’는 시즌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들어 매년 9월 경로의 날에 1회씩 특별방영됐다.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드라마여서, 주인공이던 부모 세대가 늙고 자녀세대가 부모가 돼 가족을 꾸려가면서 스토리는 무한정 펼쳐졌고 연 1회씩 방영되면서 시대정신도 반영됐다. 이 연간 드라마는 2019년까지 방영됐는데 지난해는 코로나 탓인지 건너뛰었다.

그러고보면 지난해 코로나 사태 초기 요코하마 항에 정박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봉쇄로 시끄러웠을 때, 그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의 유일한 낙이 크루즈 여행이었는데 당분간 그것도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는 여름쯤 그의 말투 그대로 “아타미(자택)에서 얌전하게 ‘방콕’ 중”이라는 소식을 일본신문 한 귀퉁이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래픽 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한국에서 급증하는 ‘웰다잉’ 의향서

한국에서도 죽음의 문화는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수명이 길어졌지만 건강하지 않은 여생 또한 길어졌다. 이에 불필요한 의료로 고통의 시간을 연장하는 것을 지양하고 인간의 기본권으로서의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찾자는 움직임도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2018년 2월부터 ‘웰다잉법’, ‘존엄사법’이라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자는 법으로 ‘소극적 안락사’라 할 수 있다. 임종 단계 환자는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등 연명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다. 또 적극적으로 고통을 줄이고 가족과 따뜻한 작별을 나누며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움 받을 수 있다.

연명의료법 시행 만 3년을 넘긴 4월 9일 현재 복지부 집계에 따르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존엄사를 택한 사람은 15만97명에 달했다. 나중에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을 때 연명의료를 거절한다는 의향서를 미리 작성해 놓은 사람이 약 87만 명이다. 모두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의향서 등록자는 연령대별로는 70대가 가장 많고 여성이 남성의 두배가 넘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