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신 빛바랜 문재인 정부 4년의 현 주소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벌어진 한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2009년 5월 29일 서울 경복궁 홍례문 앞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 앞에서 비례(非禮)를 사죄하며 고개를 숙인 모습이다. 그에게서 대인(大人)의 기개가 엿보였다. 주군(主君)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정적(政敵)에게 한 없이 자신을 낮춘 모습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문 전 실장의 사과는 백원우 민주당 의원의 돌출 행동 때문이었다. 노무현 청와대에 근무한 백원우는 장례식장에서 MB가 헌화하려 하자 “사죄하라. 정치적 살인이다”라고 고함치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逝去)는 검찰 수사를 집요하게 만든 MB가 배후라고 확신한 데 따른 것으로 짐작됐다. 그의 돌발 행동에 영결식장에선 “그냥 놔둬라” “사죄하라”는 고함이 터져 나오는 등 어수선했다. 문 전 실장이 정중하게 사과하고 이 대통령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분위기는 다소 누그러졌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 9월 어느 하루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대정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난 뒤 휴식을 취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해 극심한 레임덕을 겪어야 했다. 노무현대통령장례위원회 제공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2009년 5월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하려는 순간 “사죄하라. 정치적 살인이다”고 고함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이 대통령에게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동아일보DB
민정비서관이 어떤 자리인지는 누구보다도 문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첫 조각 때는 부산 참모 출신 이호철이 민정비서관을 맡았다. 민정비서관은 권부(權府)의 핵심이다. 문 대통령이 그런 자리를 백원우에게 맡긴 것은 적지 않은 시그널을 주는 정치 행위였다. 일각에선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당시 사과가 진심을 담은 게 아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 후 8년 동안 칼을 가슴에 벼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백원우는 청와대에서 부처들의 적폐청산 태스크포스를 주도하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과거를 지우는 데 앞장섰다. 여의도 정가에선 가혹한 보복 정치의 서막(序幕)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문 대통령이 균형감을 갖고 있었다면, 만약 제대로 적폐청산을 하려고 했다면 그 자리엔 균형감을 인정받는 관료 출신을 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MB가 노무현을 죽였다’고 비난하는 친노 인사들이 적지 않지만 ‘노무현 정신’에 부끄러운 뇌물 사건이 사건의 본질이요, 진실에 가까운 분석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에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리셉션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이명박 전 대통령. 평창올림픽을 유치한 이 전 대통령은 메인 테이블에서 떨어진 구석진 곳에 앉았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MB는 “임기 중 올림픽을 유치한 대통령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다. 그래도 내가 대통령 때 유치한 행사에 빠질 수 없다”며 참모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행사장에 갔다. 하지만 행사장에서 그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개막 리셉션의 좌석은 문 대통령이 앉은 메인 테이블과 멀찌감치 떨어진 장소였다. 야외행사인 개막식 스타디움에서도 외국 원수(元帥)가 아니라는 이유로 일반인들이 입장하는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좌석 또한 문 대통령과 한참 떨어진 곳에 배치했다. 평창올림픽을 유치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치고는 도리에 어긋난다며 MB 참모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여야를 떠나, 이념을 떠나 도리의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받고 2년의 실형을 산 이 사건을 놓고 문재인 정부는 진상을 다시 파헤쳐보겠다고 나섰다. 한명숙에게 무슨 빚을 졌기에 대법원 판결까지 난 사건을 뒤집으려하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는 한 전 총리가 노무현재단 앞에서 시위를 할 때 “뇌물이 노무현 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찼다.
2009년 12월 뇌물 수수 의혹을 받았던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검찰수사관들에 체포돼 연행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정치적 희생양이라며 노무현재단에서 시위를 벌였다. 동아일보DB
하지만 민주당은 당규를 뜯어고치면서까지 1년짜리 시장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다. 당규를 고치면서까지 반칙한 민주당 지도부를 대통령이 뜯어 말렸다면, 민주당이 후보를 내는 것에 대해선 ‘염치없는 일’이라며 대통령이 꾸짖었다면 어땠을까. 노 전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문 대통령은 여당의 거침없는 독주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부작위(不作爲)는 그 자체로 시그널이다.
2018년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입장하고 있다. 그는 외국 원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VIP 출입구가 아닌 일반 출입구로 입장해야 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가 후보로 확정된 후인 2002년 4월 30일 서울 상도동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 오래 전에 일본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이 선물한 시계를 차고 와 내보이고 있다. 동아일보DB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