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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 흔적을 지운 타임캡슐[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1-04-13 03:00:00


사리봉영 의식의 자초지종을 기록한 금제 사리봉영기. 불사 발원자를 ‘백제 왕후이신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 발굴은 21세기 최고의 발굴로 손꼽힌다. 석탑 해체 과정에서 불사리, 사리기, 공양품 등 1만여 점의 유물이 봉안 당시 모습을 간직한 채 발견된 것이다. 압권은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라 이름 붙인 금판이다. 앞뒷면 빼곡히 글자가 새겨졌는데, 백제 무왕의 왕비 사택 왕후가 발원하여 절을 세우고 불사리를 모셨다는 내용이었다.

○ ‘시멘트 뒤범벅’ 국보 해체

미륵사지 석탑은 오랫동안 또 다른 백제 석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비해 규모가 큰 현존 최고의 백제 건축물로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도 1990년대 후반까지 이 석탑의 아름다움을 살피려 현지를 찾은 시민들은 한결같이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냈다. 석탑의 절반 이상이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어 ‘대한민국 국보 제11호’의 위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석탑의 붕괴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콘크리트로 복원한 것이 80년 이상 그대로 방치된 것이다.

문화재위원회는 1999년 이 석탑의 해체 복원을 결정했다.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석재의 원래 위치를 찾아내 복원하기로 한 것이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나니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탑 부재의 원위치를 찾기가 어려웠고, 석재가 약해 원위치에 끼워 넣을 경우 석재가 부서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복원 공사는 차일피일 늦어졌고 정체불명의 투서로 수사당국이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 돌기둥 속의 ‘불사리’

석탑 복원 사업을 시작한 지 만 10년에 이르던 2009년 1월 14일, 수많은 논란을 일거에 잠재우는 중요한 발견이 있었다. 조사단은 며칠 전 석탑 바닥면 중앙에 세워진 네모난 돌기둥(심주·탑 중심에 세운 기둥)에 레이저 물리탐사를 하다가 동공(洞空)의 흔적을 확인했다. 조사원들 사이에서는 이 동공이 혹시 사리공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겨났다.

1월 14일 오후 3시. 조사단은 2조각으로 구분돼 있는 돌기둥 윗부분을 크레인으로 들어올렸다. 고고학, 미술사, 보존과학 전문가들이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사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돌을 들어올리는 순간 번쩍 빛이 났다고 한다. 사리공 속에 순금으로 만든 유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환호했지만 곧이어 어떻게 유물을 수습해야 할지 걱정이 생겼다. 무령왕릉 발굴 실패 사례를 복기하면서 발굴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며 유물 수습에 나섰다. 발굴 과정에 대한 사진, 영상 촬영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자료를 3차원(3D) 자료로 남겼다.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특히 조사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사리봉영기였다. 봉영기 내용을 차례로 읽어 내려가던 한 조사원은 빼곡히 새겨진 글귀 가운데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라는 표현에 숨이 멎을 것 같은 흥분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금판을 수습해 뒷면을 보니 ‘대왕폐하’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대왕은 바로 백제 무왕이었다.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셨다는 내용도 있었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네모난 사리공의 한 변 길이가 25cm, 깊이가 26.5cm에 불과한데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각종 직물이 들어 있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나서 시간을 확인하니 이튿날 오후 9시. 유물 수습에 꼬박 30시간이나 걸린 것이다. 사리공에서 나온 유물은 무려 9947점에 달했다. 이 일괄품은 2018년에 보물 제1991호로 지정되었다.

○ ‘감쪽같이 사라진’ 선화공주

불사리가 들어 있던 금동제 사리외호. 이 안에 금제 내호가, 또 그 속에 유리병이 나오는 3겹의 구조였다. 문화재청 제공

발굴 성과를 놓고 학계는 반색했지만 한편으론 딜레마에 빠졌다. 석탑 사리공 속 유물은 639년 1월 29일에 마치 타임캡슐을 묻듯 밀봉되었다가 1370년 만에 개봉된 것이다. 석가탑이나 분황사 탑 등 신라 석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 가운데는 후대에 공양품을 추가로 매납한 사례가 있지만 미륵사지 석탑은 당초의 모습 그대로 전격 공개된 것이다.

고고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은 7세기 백제 유물의 연대를 설정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출현했다며 흥분했다. 7세기 백제 유물이 많이 출토되긴 해도 그것을 언제쯤,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미륵사지 사리공 속 유물은 학자들에겐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1971년 무령왕릉 속에서 6세기 초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진 것에 비견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백제사를 전공한 학자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간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면서 무왕의 왕비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일 것으로 여겨왔는데,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봉영기에 무왕의 왕비가 백제 유력 가문 출신인 사택 왕후로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이 발굴로 선화공주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많아졌다. 하지만 무왕에게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재작년에는 선화공주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익산 쌍릉 가운데 소왕묘를 발굴했지만 결정적 단서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봉영기가 처음 발굴되었을 때만 해도 머지않아 7세기 백제사와 백제 문화가 다 드러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12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연구의 진전은 더디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선화공주’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착 때문이 아닐까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쌓여 지금도 여전히 사리공 속에 봉인된 백제사의 실타래가 풀리면 역사도 좀 더 선명해질 것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