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입법 부실 사전검증
양종구 논설위원
#2. 지난해 9월 국회에서 통과된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 개정안은 10일 이내인 가족돌봄휴가를 최대 25일까지 쓸 수 있게 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이 가장 먼저 제안된 건 그해 6월. 미래통합당이 21대 국회 출범 직후 당론으로 채택해 의원 전원 이름으로 공동 발의하면서다. 이후 석 달간 여야 의원들은 비슷한 내용의 법안을 6개나 추가 발의했다. 핵심은 모두 유급 가족돌봄휴가 확대였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문위원들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는 개략적인 현황 설명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채워졌다. 보고서는 사실상 ‘복붙’(복사+붙여넣기)에 가까웠다.》
토씨만 바꾼 ‘복붙’ 많아
의원들의 법안 발의를 무조건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법안 건수에만 집착하다 보니 법안 발의 모양만 내는 꼼수가 판치고 있다. 한 의원 보좌관은 “과거 폐기됐던 법안을 찾아 토씨나 명사만 바꿔서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무소속의 한 의원은 오래된 용어 하나만 바꿨는데 그 용어가 들어간 기존 12개 법안이 새롭게 개정안으로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 중 원안이나 수정안으로 가결되는 등 실제 법률에 반영된 것은 절반도 안 되는 8061건에 불과했다. 이러니 의원입법 남발은 정해진 대로 물건만 만들어내고 보는 ‘컨베이어벨트 공정’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 공정’ 지적도
더불어민주당은 논란이 되는 법안을 야당을 무시하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입법 독주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의원입법을 활용했다. 일례로 부동산 대책에 대한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부동산 관련법과 주택임대차보호법을 의원입법으로 강행했다.
정부안이 제출되면 입법예고→영향평가→법제처 심사 등 절차에만 최소 4개월 정도 걸리지만 의원입법은 구성 요건만 갖추면 며칠 안에 법안 통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입법 속도에 매달리다 보니 웬만한 심의 절차도 무시되는 일이 빈번했다.
홍석빈 우석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는 “사전적 입법 영향 분석 등 이런 제도 도입을 추진하는 이유는 법안 시행 후 예상되는 역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검증된 틀을 무시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육위 건당심사 4.7분
일부 의원의 입법 남발은 부실 심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교육위원회는 지난해 정기국회에서 법안심사 소위를 네 번 여는 동안 법안 205개를 16시간 동안 논의했다. 법안 1건당 투입된 시간이 평균 4.7분에 그친 셈이다. 환경노동위원회(7분), 보건복지위원회(9분), 외교통일위원회(10분) 등 다른 상임위 사정도 비슷하다. 법안심사 소위가 한 번 열릴 때마다 수십 건에서 많으면 100여 건의 법안이 상정되다 보니 상임위 전문위원들이나 의원들이 법안 내용을 제대로 따져볼 엄두를 못 내는 게 현실이다.
의원들의 부실 입법을 모두 의원 개인 탓으로 돌릴 순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중시하는 공천 제도와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 공천 심사 기준에 들어가는 의정활동 평가에는 법안발의 성과가 중요한 항목 중 하나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각종 시민단체들이 ‘최다 발의’ ‘최소 발의’ 등을 기준으로 의원들을 평가하는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양종구 논설위원 yjongk@donga.com
英-獨-스위스 등 입법영향분석제도 시행
정부가 제출하는 법안은 물론이고 의원이 발의하는 법안에 대해서도 입법영향분석제도를 시행하는 국가가 적지 않다. 법안이 미칠 영향과 비용 등을 미리 점검해 무리한 입법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1998년 입법 과정 등에서 새로 만들어진 주요 규제안에 대한 규제영향평가를 의무화했고, 2007년에는 입법의 영향을 보다 폭넓게 분석하는 영향평가(Impact Assessment)로 확대 개편했다. 이는 규제 외에도 다양한 정책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비용과 편익을 관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정부제출안과 의원발의안 모두에 대해 평가가 실시된다. 의원안에 대한 영향평가는 해당 법령을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실질적으로 수행한다. 영향평가서는 법안과 함께 의회에 제출되며 법안 심사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2008∼2020년 총 4300차례에 걸쳐 영향평가가 이뤄졌다.
독일에서는 사전입법영향분석, 병행입법영향분석, 사후입법영향분석 등 3단계로 입법영향분석을 실시한다. 사전입법영향분석 단계에서는 입법 계획 수립, 법률 초안 구상 및 작성 등이 이뤄지는데 의원안도 분석 대상에 포함된다. 한 예로 지난해 9월 연방하원에 의원이 제출한 ‘코로나19 파산신청중지법 개정안’에는 법률 및 행정의 간소화, 지속가능성, 재정지출, 이행비용, 기타 입법 영향 등에 대한 입법영향분석이 포함됐다.
스위스는 헌법에 입법영향평가제도의 근거를 마련한 국가다. 1999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연방의회는 연방이 취한 조치의 실효성 평가가 진행되도록 보장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했다. 연방 및 각 주(州)의 법률 90여 개에 입법영향평가 관련 조항이 반영돼 있다. 의원안과 정부안 모두 사전입법영향평가의 대상이며, 의원안에 대해 평가를 할지는 해당 소관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