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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협, 갈길 먼데 한미동맹 정체성은 ‘우방과 제국’ 사이 갈팡질팡[화정안보포커스]<7>

입력 | 2021-04-14 11:25:00



 


(오프닝) 안녕하십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무리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해서 동맹을 돈으로 계산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동맹의 연대와 가치를 강조했지만, 한미 동맹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얼마나 견고한지 한미 동맹의 정체성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화정 안보 포커스는 ‘한미 동맹 어디에 와있는지’ 혹은 ‘한미 동맹의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겠습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최근 언론 기고에서 한미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국가 이익이 일치해야 된다는 분석을 하셨습니다. 한미관계는 갈등도 없지 않았지만 상당기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미 양국이 동맹을 통해서 얻는 국가이익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까요.


A.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 동맹의 성격이라는 것은 그 출발은 공산주의에 대한 봉쇄, 또는 공산주의에 확장을 막는다라는 것에서 시작을 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간의 이해관계가 조금 변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 아닌가. 일차적으로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부분들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한국의 가치라는 것이 안보적 가치에다 플러스 경제적 가치가 굉장히 커지기 시작했다라는 부분에서 변화가 첫 번째로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체제 혹은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냉전하에서 같은 이해관계나 가치를 가지고 갔던 부분들이 깨어져 나가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분열점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요. 세 번째는 남북한을 비교해 보았을 때 국력이 1970년대 초반 남한의 국력이 훨씬 더 커지면서 북한과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부분들이 변화가 생겼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 이해관계나 서로간의 가치 부분들이 바뀔 수 있는 지점이 생겼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부상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큰 것 같습니다. 소련이 몰락을 하고 난 다음에 중국이 부상을 했고 중국이 부상을 하면서 한반도라고 하는 지정학적 위치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는 부분들이 발생을 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Q.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동맹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 필요하기 때문인데 미국에서 보았을 때 한국의 필요, 또는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도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이 부분은 미소 냉전 시대와 미중 신냉전 시대에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A. 처음에 냉전이 시작될 때는 미소 간에 냉전이 중심이 되는 그런 상황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가 냉전의 최전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시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일차적으로 북한이 다시 침략하는 것을 막겠다라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제일 중요한 동맹국인 일본을 보호해야 된다라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들이 미중 간에 갈등, 미중 간에 세계 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이런 구도로 바뀌면서 한반도의 상황이 좀 변화를 한 것 같습니다.

소련이 몰락하고 중국만이 남게 되면서 중국이 부상을 하게 되니까 사실 북한 문제에 있어서도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이슈가 되게 되고요. 또 한반도라는 것이 전에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것을 다 보는 관계였지만 이제는 중국에 붙어 있는 한반도라는 관점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전하고 조금 다른 측면에서 한반도의 가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국학자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중국학자들은 대부분 주한미군 역할이 더 강화될 것이다라는 부분들을 많이 지적을 합니다. 이 부분들이 중국의 부상에 대해서 미국이 견제를 하면서 한반도를 굉장히 중요하게 지정학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부분들이 미국 쪽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Q. 앞선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이번에는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역할, 필요성 이런 부분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남북 관계 측면에서 보면 소위 보수와 진보사이에 굉장히 시각차가 있습니다. 한미 동맹 강화가 남북 관계에는 해롭다라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A. 저는 한미동맹이라는 것이 한국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희가 국가이익이라고 할 때 정치 군사적인 안보가 하나가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프로스페리티(Prosperity·번영) 이 두 가지 부분이 국가이익에 핵심인데 저는 한미동맹에서 이 두 가지 이익에 어떤 성장과 진화라는 부분을 이야기하기에는 어렵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대가 지나면서 상황에 변화가 오면서 이 부분에서도 균열이 나타나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와 한미동맹이 시대에 맞게 진화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 부분들이 어떤 다른 문제로 인해서 균열이 가거나 깨진다라는 부분에서는 저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경제 자체가 기본적으로 시장주의에 기반을 하고 있고 세계경제 속에 녹아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과 동맹관계라는 부분들을 깨고 나간다라고 한다면 저는 중요한 축에서의 경제부분에 대해서 프로스페리티 부분이 깨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국가이익이라는 측면에서도 또 경제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하고요. 다른 한편으로 군사적인 측면에서 미중갈등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은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이 가지고 있는 동북아에서 균형자적인 역할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동아시아에 위치를 하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대해서는 한미 간에 군사동맹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Q.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 중에서 일부 언급을 하셨는데 교수님이 최근 언론 기고에서 한미 관계도 시대 변화에 맞게 진화해야 된다 이런 구절이 굉장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시대에 맞는 진화된 한미 관계, 어떤 모습인가요.

A. 이전의 한미관계는 냉전하에서 정치 군사적인 안보문제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가 더 앞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부문은 6·25전쟁 직후라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했던 거고요. 지금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들 이해관계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이 문제들을 서로 동맹관계에서 서로가 어떻게 경제적으로 윈윈(Win Win)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가 라는 방식의 고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트럼프 행정부에서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문제를 얘기한 거라든가 또 그 이전에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한국정부에 이관을 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미국이 처하고 있는 어떤 경제적인 문제, 미국의 세계전략의 문제와 연관이 되는 문제이고요. 또 한국 같은 경우도 미국이 가장 큰 트레이드 파트너였지만 지금은 미국 외에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경제적인 위협대상국들이 굉장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한국과 미국이 어떻게 이 경제적인 이해관계들을 윈윈 할 수 있는 가를 고민해야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Q. 한미관계에서 경제적인 문제들 이런 부분들은 평소에 많이 듣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한 가지 일반 사람들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굉장히 고도화되었기 때문에 한미 관계가 어느 때 보다도 강화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저는 당연히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고 핵우산이 억지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동맹이라는 것이 군사적인 부분에서 지금 상황에서는 지속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과거와는 다른 방식에 어떤 진화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해요. 과거에는 북한의 지상군들이 남침을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은 북핵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그런 동맹관계로 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 군사전략부분에서도 분명히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에 대해서 한국과 미국이 조금 다르게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것은 북한 정권하고 북한 체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북한이 압박을 계속하고 봉쇄를 늘리면 항복을 할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것하고 그렇게 하더라도 북한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오히려 버틸 것이다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이런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결국은 해결책을 바라보는 한국과 미국사이에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Q.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 세 번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그 사이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고도화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계속 남북대화, 남북관계 개선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어떤 학자는 북한에 가스라이팅(gaslighting·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 당했다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북핵과 인권을 강조하다 보니까 문재인 정부하고 엇박자가 나고 서로 동상이몽 될 것이다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A.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초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다들 기억을 하시겠지만 2017년을 통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전쟁위기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위기가 고조되었기 때문에 그 위기를 빠르게 해결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고요. 마침 2018년에 평창 동계올림픽이 있었던 부분들이 이 부분들을(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분명히 했고 또 그 과정에서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주목하는 것이 북미정상회담입니다. 이전의 트럼프 행정부에서 했다고 하더라도 한 번 미국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가 만났다는 것은 무를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한 번 되었기 때문에 미국과 북한사이에 어떤 협상을 할 때에 그 협상의 기본 베이스를 한 단계 높여 놨다라는 생각 합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나오는 얘기는 저는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북한에서 인권문제라든가 북한을 압박을 해야 되고 그것을 통해서 북한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야 된다는 것이 하나 있다면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오바마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해결하려고 하는 흐름도 저는 하나 존재한다고 봅니다. 물론 지금에 있어서는 인권적 측면에서 압박을 하는 부분들이 훨씬 더 강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모른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 정부는 두 가지 부분들을 다 고려해서 여러 가지 플랜 B와 옵션들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저는 기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Q. 교수님은 미국이 우리에게 비치는 모습을 ‘우방과 제국’ 이 두 가지 신화가 있다라고 과거에 내신 책에서 정리를 했습니다.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는데 그 개념으로 보면 지금 미중 갈등 속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은 제국의 모습이 더 강하게 비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A. 저는 기본적으로 우방과 제국이라고 했는데 미국의 정책적 측면에서가 아니고 우리사회가 미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식에 대한 부분입니다. 우리사회가 한편으로는 우방이고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친구라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무엇인가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제국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최근에 나타나는 미중관계 속에서는 뭔가 미국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측면 즉 제국의 측면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저는 일차적으로 언론의 책임이 있는 것 같고요. 언론이 자꾸 그런 부분들을 부각시키고 있고 미국의 정책에서의 큰 변화가 있다라고는 생각하기 않습니다. 두 번째는 미국 자체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라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 같고요. 예전에 개발도상국들의 정책에 대해서 굉장히 포용적이고 이런 부분들을 안고 가려고 하다가 사실은 미국 자체가 지금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고 한 상황에서 여유가 없어지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 약간 압박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이런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를 하는 것 같고 지금 미중갈등에서도 중국이 일대일로를 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미국은 WTO(세계무역기구)나 FTA(자유무역협정) 같은 어떤 규율을 가지고 세계 경제의 질서를 만들어 갈려고 하는 반면에 중국은 대륙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니 직접 연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보여주는 세계 경제 시장에서 중대한 도전이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 미국이 경제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굉장한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고 그 상황 속에서 나타난 정책들이 한국사회 입장에서는 이것이 친구보다는 굉장히 제국으로서 우리를 힘으로 압박하는 것이 아닌가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이 분명히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바쁘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 윤융근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기획위원




협력 속 갈등의 한미 동맹

1. 변화하는 한미 동맹



한미 양국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공산주의에 맞서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법적인 동맹의 틀이 마련됐다. 통상 공동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맹이 맺어진 뒤 제3의 위협에 맞서 싸우는데 한미는 먼저 공동의 적과 함께 싸운 뒤 동맹을 결성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미 동맹은 지금까지 굳건히 지속되고 있지만 동맹이 지속되는 동안 주변 전략적 환경 변화 등에 따라 상호의 역할과 위상, 기대와 필요성 등에 변화가 있었다. 양국간에는 이런 변화에 맞게 서로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이견과 갈등도 종종 나타났다.

최근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전략적 환경 변화로는 첫째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지형 혹은 안보 정세가 미소 냉전 구도에서 미중 패권 경쟁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미국이 중국과 전략적 패권 경쟁을 벌이면서 동맹국 한국에 대한 요구가 한국의 전략적 이익과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양국 관계의 변수가 될 수 있다.

둘째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불과 수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이제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미국을 상대로 블러핑(bluffing)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북핵 능력 고도화는 그 자체가 주는 위협도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한미의 접근이 다를 수 있어 한미 동맹 관계에도 파급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방점을 두는 문재인 정부와 북한 비핵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조 바이든 정부와의 엇박자가 우려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셋째는 한국과 미국 양국 모두 내부적으로 상대국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한국에 대한 급격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심지어 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는 비용을 분담하는 항목에 추가하려고 했다. 이는 사업가 출신의 트럼프 대통령이 동맹을 돈으로 계산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6·25 직후처럼 미국이 안보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한국을 인식하기보다 상호적인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고 세계 10위권 경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안보 우산을 제공하는 만큼 상응하는 댓가를 지불하는 등 안보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의식이 커진 것이다.

한국의 미국에 대한 인식도 안보를 제공하는 동맹국이지만 부정적인 영향은 없었는지, 나아가 앞으로 한중 관계, 남북 관계 등에서 한미 관계가 장애 요소가 되지는 않는 지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양국간의 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적절한 변화, 동맹 관계의 진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찰과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70여년 동안에도 크고 작은 이견과 갈등이 있었다. 밀월과 우호의 기조 속에서 나타났던 마찰과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한미 동맹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미국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를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종종 쓴 맛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2. 이견과 갈등의 역사



▷한미동맹조약 체결 진통: 에버레디 계획과 반공포로 석방



한미 관계의 첫 시련은 동맹 조약을 맺기 전 찾아왔다. 6·25 전쟁의 휴전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행정부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구금하는 것을 포함한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고, 이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1950년 6월 전쟁이 발생한 이듬해 초 전황은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고착되고 지루한 고지전 소모전으로 돌입했다. 미국은 그해 3월경부터 북위 38도선을 경계선으로 휴전하는 방안을 마련했고 소련도 미국과의 비밀 접촉 등을 통해 휴전에 긍정적으로 나섰다. 1951년 7월 10일 1차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시작됐다.

휴전 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정을 두고 38선 복귀를 고집하는 공산측과 현 대치 전선을 내세운 유엔군측 주장이 다르고, 전쟁 포로 처리도 포로 전체의 강제 송환을 주장하는 공산군과 포로 개인 의사를 존중, 자유 송환을 주장하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맞섰다. 휴전 회담이 시작된 지 2년 가량 진전을 보지 못하다 1953년 들어 급진전됐다. 그해 1월 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취임하고 소련에서는 3월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한 것도 큰 계기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토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휴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공군이 철수하지 않는 상황에서 휴전이 이뤄지면 한국에는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휴전 협정이 진전되면서 압박이 강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이되 중공군 철수, 휴전 협정 체결 전 한미안보조약 체결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단독 북진을 감행하거나 유엔군사령부에 넘겨 준 작전통제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지휘 통제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맞섰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말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 질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 1953년 5월 ‘에버레디 계획(상시대비 계획)’을 마련했다. 한국군이 유엔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독자적인 작전을 전개하거나 혹은 유엔군에 공공연히 적대행위를 할 때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선언한 뒤 주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체포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체포 대상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승만 제거 계획’으로도 불렸다.

6월 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서명되는 등 휴전 협정이 급진전되는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은 18일과 19일 이틀간 전국 7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당시 한국에는 약 3만5000여명의 반공 포로가 7개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는데 관리는 미군이 담당하지만 경비 병력의 대다수는 한국군이었다. 이틀간 2만7389명의 반공 포로가 헌병총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한국군 경비병의 묵인과 협조하에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전체 수용자의 76.7%를 차지했다. 탈출 후 931명은 체포됐고, 미군 기지 내에 있던 부평지구 제10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던 포로들은 미군 경비병의 기관총과 소총 사격으로 61명이 사망했다. 포로 분류에서 친공(親共) 포로는 거제도에 남아있었는데 거제 수용소는 석방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같은 진통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서명된 뒤 그해 10월 1일 한미 동맹의 초석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됐다.



▷‘닉슨 독트린’과 박정희 정부의 자주 국방



참전 명분을 두고 논란이 많은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해 한미 양국 동맹은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960년대 말 한미 양국간에 ‘안보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났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틀 후 미국 해군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1월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으로 남북 긴장이 고조됐다. 하지만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개되는 무력 도발과 충돌에 대해 국지적인 사안으로 치부하고 심각성을 느끼지 않거나 주요 관심사로 두지 않았다. 한국이 느끼는 안보 불안에 비해 미국은 대수롭지 않게 느끼는 ‘안보 인지 감수성’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이 깊어지면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지자 베트남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점차 발을 빼려는 정책 수정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군사적 조치 등 강경 대응보다 협상으로 타결지으려 했던 것도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1968년 11월 당선된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인 1969년 7월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핵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스스로 방어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이 있으며 미국은 베트남 전쟁처럼 휘말리는 정책은 피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줄이고 자주 국방을 강조한 것은 이같은 한미 동맹을 둘러싼 안보 환경 변화에 배경을 두고 있다.

1970년대 초 남북한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은 중국과 ‘핑퐁 외교’ 등 데탕트 국면으로 전환했다. 남북간에도 제한적인 수준에서 남북 대화가 진행됐지만 1970년대 미중 화해가 남북 대치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를 당황하게 했다. 미-중간 전략적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 직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과거는 미-중 화해, 지금은 미-중 갈등이 남북 관계 설정에 영향을 주고 있는 점이 다르다.



▷ 1970년대, 한미 ‘핵과 인권’ 갈등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주기적인 주한 미군 철수 방침 발표 및 실제 1개 사단 철수 등의 상황을 맞아 한국군 현대화 및 자주국방을 추진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이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약소국이 독자적인 방위력 강화에 나서는 것은 강대국 동맹국에 대한 불신 불만을 반영한 것이자 동맹 이탈의 전조일 수도 있다. 더욱이 약소국이 핵무기 개발까지 나선다는 것은 동맹의 신뢰에 관계되는 것이자 핵 비확산 체제 유지와도 관련이 있어 사안은 더 엄중해진다.

박정희 정부가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 것은 1970년 3월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가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통보하면서부터다. 안보 동맹국으로서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미 동맹 갈등사’ 163쪽).

1974년 5월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핵확산 위협에 관심을 높이고 핵개발 국가를 비밀리에 조사했는데 그해 11월 한국의 핵개발 의도를 뒤늦게 파악했다. 미국은 한국이 원자로를 구입한 캐나다와 접촉해 한국의 원전 재처리 시설 보유 방지에 나섰다. 제럴드 포드 정부는 유사시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시사해 안보 불안을 줄이고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장비와 연료를 공급하는 강온 전략을 구사했다. 결국은 박정희 정부는 결국 프랑스로부터의 재처리 기술 도입도 포기해 핵개발의 길을 가는 것을 중단했다.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고 미국은 저지하려한데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등 안보 불안이 높아졌지만 미국은 포드에 이어 지미 카터 정부에서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카터 정부는 유신체제하의 한국의 인권 상황에 더 주목했다. 1979년 6월 정상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폐지와 가능한 많은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한 것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한미 동맹을 덜컹거리게 한 두 키워드는 ‘핵과 인권’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군의 전면 철수 압박까지 가하면서 한미 동맹은 최악의 시기라는 평가가 나왔다.


▷ ‘햇볕정책’과 ‘악의 축’


동맹의 기초는 제3의 적과 위협에 대한 공통된 인식과 대응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조지 부시 정부의 ‘악의 축’ 규정은 대북 대응에서의 ‘디 커플링’을 일으켰다.

햇볕정책은 북한 체제가 가진 안보 불안을 줄이거나 해소시켜 줌으로써 핵개발 등의 현안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분단 후 첫 남북정상회담인 2000년 6·15 회담을 적극 지지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교차 방문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2000년 1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클린턴의 대북 유화정책 정책에서 선회했다. 이듬해 9·11 테러가 발생한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 국가로 규정하면서 ‘테러와의 전쟁’ 대상인 불량 국가로 지목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면 동맹의 기조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부시 정부 시절인 2003년 6월 경기 의정부시에서 발생한 주한 미군 병사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은 반미 감정에 불을 지폈고, 불평등한 한미주둔군 지위협정(SOFA)의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촉발했다. 여론 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호감보다 비호감이 높게 나타나고, 주한 미군 감축 여론이 더 높게 나오는가 하면 심지어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로 북한보다 미국이 높다고 응답해 한미 동맹 혹은 혈맹이라는 말이 무색한 지경이 됐다.



▷ 정체성 조정 필요한 한미 동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대북 관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양국 관계가 삐걱대는 것으로 인식하게 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바이든 정부 들어 바로 타결됐다.

하지만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전략적 환경 변화가 곳곳에서 뇌관으로 작용해 한미 관계를 흔들 수 있다.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는 미-중 갈등 속에 한미 동맹이 점점 더 깊게 휘말려 들어가는 경우 한미 동맹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커질 수 있다. 한국은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이어 미국 호주 일본 인도의 협의체인 쿼드(QUAD) 등 미중 사이에서 선택의 압박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고도화하는 가운데 대북 관계 설정을 두고 한미 간에 이견과 갈등이 지속될 수 있다. 남북 관계 개선에 중점을 두는 문재인 정부와 북한 비핵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의 엇박자가 우려되고 있다. ‘햇별정책’과 ‘악의 축’ 시대와는 성격이 차이가 있지만 남북 관계에 대한 한미 간 인식이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다른 버전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미중 갈등이나 북한 변수 못지않게 한미 동맹의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로는 미국이 한미 동맹 혹은 주한 미군의 용도를 한반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된다. 즉, 한미 동맹이 처음 출발은 북한의 위협에 대한 공동의 결의를 나타낸 것이지만 이제는 글로벌 차원의 안보 동맹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2003년부터 적용하는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GPR)’에 따라 주한 미군은 대북 방어만이 아닌 글로벌 차원에서 활동하는 기동군 개념이 됐다. 두 차례의 이라크 파병에서 확인된 것처럼 한미 동맹속 한국군의 활동 반경도 해외로 확대되고 있다. 달라지는 한미 동맹의 위상과 역할, 정체성에 대해 양국 정부나 국민들이 충분히 합의하지 못하거나 속도를 맞추지 못할 경우 언제든 갈등이 불거질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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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철, 『한미 동맹 50년』, 생각의 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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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 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김보영, ‘한국 전쟁 시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 교섭’ 『이화사학연구』, 38권, 2009.

이남규, ‘1953년 이승만의 세계 대전! 반공포로 석방 왜?’ 『월간조선』2003년 7월호 권말 부록.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