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서 7개월간 265명 시신 거둔 천주교 상장례봉사자 30명
“구조 기다렸을 남학생 못 잊어 세월호 비극 다시 일어나선 안돼”

세월호 참사 7주년을 하루 앞둔 15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현수막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진도=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천주교 광주대교구 상장례봉사자회 회장 이만실 씨(70·사진)가 기억하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전남 진도군 팽목항의 모습이다.
세월호 참사가 나고 나흘째 되던 날(19일) 이 씨와 회원 30명은 팽목항으로 향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에게 장례 상담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그냥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이 씨는 1977년부터 나주성당에서 숨진 이웃을 예를 갖춰 씻기고 의복을 입혀 관에 넣는 염습(殮襲)을 했다. 이렇게 이 씨가 마지막 길을 배웅한 고인(故人)만 1000명이 넘는다.
그는 2008년 광주대교구에 장례지도사교육원이 생기면서부터 자원봉사로 원생들을 가르쳤다. 이 씨에게서 염습을 배운 회원 박연희 씨(61·여). 주부인 박 씨도 이 씨와 함께 팽목항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는 아직도 인양된 남학생 한 명을 잊을 수 없다. 발견 당시 스펀지로 만든 객실용 베개와 휴대전화를 비닐 주머니로 싸서 운동화 끈으로 팔목에 묶은 상태였다.
“학생이 너무 이뻤어요. 구조를 기다리면서 휴대전화가 물에 잠길까 봐 비닐 주머니로 싼 것 같았어요. 지금도 그 학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짠해집니다. 모두 어른들 잘못이에요.”
박 씨와 회원들은 희생자가 나오면 팽목항 앞 바지선 텐트에서 먼저 흙, 해조류를 없애고 깨끗이 닦아냈다. 신원 확인소에는 희생자들을 눕힐 간이침대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이곳은 시신 보관을 위해 실내온도를 항상 8도로 유지해야 해 회원들은 늘 추위에 떨어야 했다. 숙소로 사용된 20m² 정도의 텐트 안에서 30명의 회원이 새우잠을 자야 했다. 끼니는 시민단체에서 주는 밥차에서 해결했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