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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성호]백신 위기를 불러온 세 가지 패착

입력 | 2021-04-16 03:00:00

초기 확보 오판, 컨트롤타워 실수, 국내 생산 과신
외교통상 인사 총동원, 백신 스와프 등도 검토해야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미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 착수 소식이 알려진 건 지난해 2월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때다. 한 달 뒤 미국은 독일 바이오기업 큐어백 인수도 추진했다. 10억 달러(약 1조1200억 원)를 투자하고 백신을 독점 확보하는 조건이다(큐어백 백신은 아직 개발 중이다). 임기 내내 기행을 보인 트럼프 대통령은 백신 확보전에서도 남달랐다.

당시 한국은 1차 유행이 심각했다. 확진자 줄이는 게 급했다. 외국의 백신 개발은 말 그대로 먼 나라 이야기였다. 대다수 전문가도 회의적이었다. 백신 확보 필요성을 물으면 “화이자 모더나 백신의 초기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안전성 입증이 중요하다” 등의 의견을 냈다. 물론 결정은 정부의 몫이다. 결과적으로 백신 조기 확보에 가장 유리했던 시기가 그대로 지나갔다. 분위기가 조금 바뀐 건 7월 이후다. 화이자 모더나 등의 임상 2상 결과가 나오면서다. 그렇다고 다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 만난 한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언제 개발될지 모르는,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백신에 수천억, 수조 원을 쓸 수는 없잖아요.”

정부는 뒤늦게 백신을 계약하면서 ‘확보했다’ ‘도입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손에 들어오지 않은 백신은 무용지물이었다. 지난해 말, 늦어도 올해 초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도입 시기를 당겼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 나았을지 모른다. 이를 두고 최근 정부 내에선 질병관리청에 ‘백신 전권’을 맡긴 게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역량을 떠나 방역에 신경 쓰기도 바쁜데 백신 업무까지 맡겼다는 이유다. 질병관리청이 보건복지부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등과 일하며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는 말도 나온다. 결국 4월 1일에야 범정부 백신 도입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다.

국내에서 생산될 백신을 과신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 2월 글로벌 수급난이 가중되자 미국은 수출규제 행정명령(HRPAS)을 연장했다. 2000만 명분을 계약한 노바백스 백신의 원·부자재 공급이 막혔다. 백신 제조에는 세포배양기, 필터 등 20개 가까운 원·부자재가 필요하다. 정부는 6개 부처가 나서서 원·부자재 확보에 성공했다고 밝혔지만 결과는 ‘3분기까지 1000만 명분 생산’에 그쳤다. 그나마 △상반기 중 허가 △원·부자재 추가 확보 △수율 증대라는 전제가 붙었다. 하나라도 삐끗하면 차질이 빚어진다. 정부는 15일에도 부랴부랴 새로운 국내 생산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국내 생산 백신도 완제품 수입과 마찬가지로 언제든 꼬일 수 있다.

이제 한국이 백신 위기에서 탈출할 기회는 없을까. 지난해 12월 국민의힘 박진 의원은 한미 ‘백신 스와프’를 처음 제안했다. 두 나라가 각자 여유가 있을 때 백신을 빌리고 갚자는 것이다. 물론 실현 가능성을 따져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한국이 신중하게 따져볼 처지도 아니다. 필요하면 전현 정부의 외교통상 인사를 총동원해 미국이든 어디든 보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현재 상황을 솔직히 털어놔야 한다. 비난을 의식해 “자신 있다”는 장밋빛 표현만 내놓는 건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다가올 여름 국민들에게 “올해도 휴가 가지 말라”고 또 당부할 수 있겠나.

이성호 정책사회부장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