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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그리움[이준식의 한시 한 수]〈104〉

입력 | 2021-04-16 03:00:00




해님 부끄러워 소매로 얼굴 가리고 봄날 시름겨워 화장도 마다하네.

진귀한 보물은 쉽게 구해도 낭군 마음 얻기는 너무 어려워

베갯머리 가만히 눈물 흘리고 꽃밭에서 남몰래 애를 태우네.

송옥같이 멋진 남자도 넘볼 수 있는 그대, 떠나버린 왕창을 원망할 건 없잖아.

(羞日遮羅袖, 愁春懶起粧. 易求無價寶, 難得有心郞. 枕上潛垂淚, 花間暗斷腸. 自能窺宋玉, 何必恨王昌.)

―‘이웃 여자에게(증인녀·贈隣女)’ 어현기(魚玄機·약 844∼871)


무엇이 부끄러워 얼굴 가리며 왜 화장조차 게을리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는가. 종잡을 수 없는 낭군의 마음은 원래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란다. 그저 무심할 뿐인 보물을 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지. 그러니 그대여, 남자 때문에 앙앙불락 속 태울 건 없다네. 세상에 남자가 어디 그대를 외면한 왕창뿐인가. 송옥같이 멋진 남자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사랑앓이로 힘들어하는 이웃 여자에게 시인은 당당한 도전을 권유한다. 어투는 천연덕스레 위로를 건네는 듯하지만 기실 사연의 주인공은 시인 자신이다. 시의 또 다른 제목이 ‘이억(李億)에게 보낸다’인 점이 그 증거다. 이억은 시인을 첩으로 받아들여 애지중지하다 부인의 반대가 심해지면서 돌아선 인물. 짐짓 시인은 남자에게 애걸복걸 않으리라 다짐하는 듯싶지만 도무지 초연해질 수 없는 처지가 스스로도 안타깝기만 하다. 떠난 상대를 원망하지 말자는 넋두리는 그간의 눈물과 상심에 서린 절절한 그리움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

송옥과 왕창은 각각 전국 시대, 위진 시대의 인물로 미남의 대명사로 통용될 뿐 시에서처럼 여심을 배신하여 원망을 산 것과는 무관하다. 어현기는 당대 유명 인사들과 자주 시를 주고받을 만큼 뛰어났지만 남자 문제로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다 스물여섯에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