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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지름길’ 걷던 민선 5인… MB만 시정 발판으로 靑 입성

입력 | 2021-04-17 03:00:00

[위클리 리포트]서울시장의 정치학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후 26년 동안 배출된 민선 서울시장은 새로 뽑힌 오세훈 시장을 포함해 총 5명이다. 수도 서울의 수장은 항상 대선주자로 분류되면서 중앙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중 일부는 대선에 도전해 실제로 대통령이 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 준비를 했으나 실패했다. 서울시장에 얽힌 정치적 함의를 역대 서울시장들의 대선 도전사를 통해 분석해 봤다.》


“4·7 보궐선거 이후 오세훈 서울시장의 일주일만 짚어 봐도 왜 ‘서울시장=차기 대선 주자’인지 알 수 있다.”

전직 서울시 고위 간부는 16일 서울시장이 늘 차기 대선 주자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 ‘오세훈의 일주일’로 설명했다. 선거전이 벌어질 때부터 오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장 후보들은 대한민국이 떠들썩할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당선 뒤 서울시장으로서 내놓은 ‘공시가격 재조사’ ‘서울형 거리 두기’ 등 모두가 중앙정부와 첨예한 각을 세우는 정책들이었고, 국무회의에선 장관들과 설전을 벌이며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인구 1000만 명의 수도 서울의 수장이 어떤 정책을 펼치느냐, 어떤 사업을 구상해서 실행하느냐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미치는 영향력은 그 어느 광역자치단체장이나 장관보다 크다.

○ 민선 1기부터 시작된 서울시장들의 대권 도전

지방자치제도가 시작된 1995년 이후 배출된 민선 서울시장은 총 5명이다. 민주당 조순 시장이 1995년 6월 민선 1기 시장으로 취임했다. 조 전 시장은 취임 직전 벌어졌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수습한 이후 당산철교를 철거하고 재시공하며 ‘안전 서울’ 행정을 선보였다. 여의도공원 조성 등 공원녹지 중장기 계획도 수립했다. 그러다 1997년 임기 도중 사퇴한 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해 논란이 됐다. 당시 대선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 후보 등에 비해 군소 정당 후보로서 한계에 부딪히자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전격 연합해 초대 한나라당 총재를 맡으면서 대선은 완주하지 못했다.

○ 2007년 대권 놓고 맞붙은 두 명의 서울시장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된 고건 시장(민선 2기)은 2002년 6월 퇴임하자마자 같은 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여권의 대선 주자로 다시금 떠올랐다. 다만 퇴임과 동시에 “대선 후보로 나설 일은 없다”며 불출마를 결심했고, 이듬해 노무현 대통령은 경쟁 대선 주자였던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발탁했다. 김영삼 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그가 서울시장을 거쳐 진보 정권에서도 또 한 차례 총리를 지낸 뒤 2007년 대선에선 몸값이 더 올라갔다.

그해 또 한 명의 서울시장 출신 대선 주자가 등장했다. 바로 고 전 시장 후임으로 민선 3기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명박 전 시장이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업적을 앞세워 1970년대 ‘현대 신화’를 이끈 기업인에서 명실상부한 대선 주자급 정치인으로 도약했다.

고 전 시장과 이 전 시장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유력 대선 주자로 분류돼 각종 여론조사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각축을 벌였다. 다만 두 명의 전직 서울시장이 대선 주자로 성장한 배경은 차이가 있다.

고 전 시장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업적보다는 노무현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일할 당시 대통령 탄핵안 국회 통과로 63일간 대통령 권한대행 업무 수행을 하며 보여줬던 안정감과 신뢰감이 부각됐다. 또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 인사를 놓고 소신을 보여줬던 사례가 부각되며 ‘고건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4년 시장 임기 동안 이뤄낸 2기 지하철 및 동부간선도로 개통 등의 주요 업적은 행정에 중심을 둔 성과였지 본인의 의지가 담긴 ‘대선용 성과’는 아니었다.

반면 이 전 시장은 2005년 청계천 복원으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데 이어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쏟아냈다. 이 전 시장은 서울시장으로서의 업적을 활용해 대선으로 가겠다는 노골적인 전략을 4년 내내 구사했고, 이것이 주효했다. 고 전 시장이 다시 불출마를 선언했던 2007년 대선의 승리자는 이 전 시장이 됐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 인맥은 정부 출범 이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행정부시장 출신이었고, 이른바 ‘왕차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도 서울시장 정무보좌역으로 이 전 시장과 얽혀 있었다. 이 밖에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지낸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서울문화재단 대표 출신인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대표적인 서울시 인맥이었다.

서울시장 재임 시절부터 치밀하게 공약을 설계하고 실행했던 ‘이명박 사단’이 그대로 대선 국면에서 ‘4대강 대운하’와 같은 청계천 공약 업그레이드 버전을 내놓으며 국민들에게 경제 발전의 비전을 제시했던 게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 엇갈린 3선 시장, 박원순과 오세훈

이 전 시장의 대통령 당선으로 서울시장 자리를 둘러싼 정치권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정부 첫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전 장관을 내세웠고,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오세훈 변호사를 대항마로 등판시켰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인 2004년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이른바 ‘오세훈법’을 관철한 뒤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오 변호사를 내세웠던 ‘깜짝 카드’는 주효했고 민선 4기 시장 취임 이후 오 시장은 곧바로 대선 주자 반열에 올라섰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한명숙 민주당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을 때만 해도 오 시장의 대선 가도는 거침없었다. ‘디자인 서울’을 내걸고 광화문광장 복원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건립 등 굵직한 사업들을 추진하며 ‘제2의 청계천 복원’ 효과를 노렸다. 하지만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카드를 던진 뒤 자진 사퇴한 것은 오 시장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을 남겼다. 보수 진영에선 “독보적인 차기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 대항마로 올라서기 위해 무리수를 던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오 시장의 퇴장 이후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은 유일하게 3연속 시장(민선 5∼7기) 당선에 성공하며 대선 후보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의 산파였던 박 전 시장은 취임 이후 줄곧 ‘민관 거버넌스’를 강조했다. 박 전 시장의 측근으로 시정을 함께한 이들은 20, 21대 국회에 대거 입성하면서 중앙정치 무대에서 박 전 시장의 대선 가도를 닦아 나갔다. 대표적인 인사가 정무부시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기동민 김원이 진성준 의원이다. 이 밖에도 민주당 남인순 윤준병 천준호 허영 의원 등 10여 명이 이른바 박원순계로 불렸다.

박 전 시장은 서울시 최초의 3선 시장으로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쌓으며 대권의 꿈을 키워갔다. 전임인 이명박, 오세훈 전 시장이 추진해 온 ‘뉴타운’ 정책에 반기를 들고 ‘벽화 그리기’ 등 다른 콘셉트의 도시재생사업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청계천과 광화문광장 등 대형 사업에 익숙해진 서울시민들로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자 박 전 시장은 자신의 두 번째 임기 말 대선을 앞두고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원으로 복원하고, 용산·여의도 개발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2017년 대선을 준비하다 초반에 불출마를 선언했던 박 전 시장은 2022년 대선 도전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박 전 시장의 대권 행보는 성추문 사태로 좌절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전 시장 사망으로 치러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선 7기 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오 시장은 다시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오 시장 측은 “현재로선 2022년 서울시장 당선이 유일한 장기적 계획”이라고 말했지만, 2027년 대권 도전은 부인하지 않고 있다.

강경석 coolup@donga.com·박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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