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택배노조, ‘전면전’ 예고, 왜?…“밀리면 딴 아파트도 가세”

입력 | 2021-04-17 08:20:00

택배노조, 이틀 만에 입장 선회 세대별 배송 재개
입주민 폭언, 협박문자 쏟아지자 기사 보호 차원
강경 노선 유지…택배사 설득→집단행동 나설 듯
지상 출입 금지하는 아파트 증가 추세…"시험대"




“저희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어요. 물러서면 여기서 끝이에요.”

‘택배 대란’ 논란을 일으킨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 단지와 갈등 상황에 놓인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 소속 택배기사는 지난 16일 뉴시스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배달차량 지상 진입을 전면 금지한 이 아파트와의 분쟁은 앞으로 다른 지상 공원형 아파트에서도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전초전’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17일 택배노조 등에 따르면 전날부터 고덕동 아파트에 ‘세대별 배송’이 재개됐다. 지난 14일 택배노조가 해당 아파트에 세대별 배송 중단을 선언하고 단지 입구 앞 배송을 실시한 뒤 이틀 만에 입장을 선회한 것이다. 입주민들로부터 기사들이 폭언을 듣는 등 추가 피해가 이어진 데 따른 보호 차원의 조치라고 한다.

다만 택배노조 측은 ‘시한부’ 배송 재개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강경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진경호 전국택배노동조합 위원장은 “투쟁에 동참하지 않았던 CJ대한통운, 한진 택배기사들과 주말동안 만나 설득해 다음 주부터는 더 큰 투쟁을 전개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택배노조 움직임에 일부 택배사(저탑차량을 모는 택배사)들은 함께하지 않으면서 전열이 흐트러지자 재정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아파트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노조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는 일부 택배사들에 대해 ‘불매 운동’을 벌이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고 한다.

한 입주민은 전날 뉴시스와 만나 “왜 일부 택배사만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이 택배사 없이도 그동안 잘 물건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 아파트 택배기사는 “아파트 입구 배송에 나선 택배사들을 이용하지 않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입주민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 택배노조 움직임에 동참했던 A택배기사는 입주민들로부터 협박성 문자메시지와 전화에 시달리다가 결국 다른 동네로 옮긴 것으로 파악됐다. A기사는 “택배기사를 관두겠다”는 이야기까지 하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택배노조 측은 이번 주말 내로 CJ대한통운, 한진 택배기사들을 설득해 전열을 정비한 후, 집단 움직임에 돌입하겠다는 구상을 세웠다. 오는 18일 긴급 중앙집행위원회와 25일 대의원대회를 연이어 열어 투쟁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선 해당 아파트 택배 배송 자체를 거부하는 총파업 방안 등도 거론될 전망이다.

택배노조 측이 이토록 강경 대응 기조를 고수하는 것은 지상 복합형 아파트들이 잇따라 지상 출입을 금지하는 추세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업계에 따르면 지상 출입이 금지된 아파트는 현재 전국에 179개다. 택배기사 대다수는 이 아파트들에서는 손수레로 배송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논란 주인 고덕동 아파트 바로 인근에 있는 A아파트는 다음달 1일부터 지상도로에 택배차량 출입을 제한할 예정이다. 이 아파트도 지하주차장 진입제한 높이가 2.3m여서 고탑차량은 단지 출입이 불가한 상황에 처한다.

상일동의 B아파트도 지상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 아파트에 택배기사들은 물품을 손수레로 일일이 나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공원형 아파트’가 점점 늘어나면서 택배기사들의 고충도 커져만 가고 있다.

일반 택배차량의 높이는 2.5~2.7m인데 2019년 1월 정부의 법 개정(지하주차장 입구 높이 2.7m로 상향) 이전에 만들어진 공원형 아파트들은 지하 주차장 입구 높이가 보통 2.3m여서 진입하지 못하는 택배차량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에서 손수레를 이용하면 배송에 드는 시간이 기존보다 3배로 증가하고, 저탑차량으로 물건을 싣고 나르면 노동자의 과로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택배노조 측 설명이다.
강규혁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고덕동 아파트에 대해 “서울시내에서 가장 큰 단지에 직선거리로만 2.3㎞ 전후로 돼 있고, 이 아파트에서 배송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만보기 숫자는 4만보가 넘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4만보는 물건 하나 들지 않고 운동으로만, 걷기로만, 빠른 걸음으로 해도 4~5시간 걸리는 걸음 수”라며 “맨몸도 아니고 수레에 산더미같은 물건을 끌고 있다. 게다가 비가 오거나 더운 날, 추운 날은 고통이 2~3배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덕동 아파트와의 ‘택배 갈등’을 두고 택배노조 측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이 공공연하다. 한 택배기사는 뉴시스와 만나 “점점 아파트들이 지상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택배노조 측이 택배사와 아파트 측에 전면적 투쟁을 선포한 것도 첫 단추를 제대로 끼어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특정 아파트와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또다른 택배기사는 “고덕동 아파트와 어떤 합의안을 만드느냐에 따라 이것이 하나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