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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오름 곳곳에 군사기지 구축… 아픈 과거의 역사 떠올라

입력 | 2021-04-19 03:00:00

제주의 ‘오름이야기’ <4> 동굴진지






16일 오전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를 지나 어승생악(해발 1169m) 정상으로 향했다. 청룡(靑龍)처럼 한라산 백록담을 지키는 동쪽 오름이 성판악이라면 어승생악은 서쪽을 호위하는 백호(白虎)와 같은 이미지다. 탐방로 땅바닥에는 참개별꽃, 남산제비꽃이 활짝 피었고 가막살나무, 단풍나무, 윤노리나무가 연둣빛으로 물들면서 봄이 곁에 왔음을 알렸다. 어승생악 정상에 이르자 사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라산 정상 방면으로 어리목계곡이 웅장하게 다가왔고, 바다 쪽으로는 제주시 한림항 앞 비양도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어승생악 정상에 자연 풍경과 대비되는 시멘트 시설 2곳이 있었다. 3m 남짓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 보니 직사각형 창으로 서부지역 해안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태평양전쟁(1941∼1945년) 말기 미군과의 전투에 대비해서 만든 일본군 토치카(중화기를 배치하기 위해 콘크리트 등으로 만든 진지)였다. 당시 제주에 주둔해 일본군을 총지휘한 58군사령부가 토치카를 비롯해 오름 곳곳에 동굴진지(갱도진지)를 만든 것이다.

한라산 지역뿐만이 아니다. 해안에서도 일제강점기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서귀포시 성산일출봉은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지만 남쪽 절벽 아래에 볼썽사나운 인공 동굴이 여러 개 있다. 입구의 가로세로 크기가 각각 3m 내외로 길이는 들쭉날쭉했다. 일본 해군특공기지가 주둔하면서 어뢰정기지로 썼던 동굴이다. 미군 함정이 접근하면 1인용 어뢰정으로 돌진해 폭파시키는 작전용이었다. ‘가미카제(神風)’ 비행기처럼 ‘바다의 자폭특공대’인 셈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는 진지 구축 작업만 했을 뿐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 오름 곳곳에 군사기지 구축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성산일출봉 남쪽 절벽 아래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미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1인 어뢰정’을 감췄던 해군특공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은 광복 이후 해녀들이 성게 알을 채취하는 작업 공간 및 휴식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제주는 일본군이 구축한 군사시설로 가득했다. 일본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제주를 최후 방어진지의 하나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점령했던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한 방어 전략이 1945년 2월 세워졌다. ‘결호작전(決號作戰)’으로 불린 본토 사수 전략에 제주를 ‘결7호 작전 지역’으로 정한 것이다. 일본은 당시 결1호 홋카이도(北海道) 및 지시마(天島), 결2호 도호쿠(東北) 등으로 구분했는데 일본 본토를 제외한 지역은 제주가 유일하다.

제주가 일본군 중요 거점이 되면서 58군사령부 휘하에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등의 병력이 요새를 구축하고 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1945년 3월 3000여 명이던 주둔 병력은 8월 종전 무렵 7만5000여 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23만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인력이었다. 일본군 군사시설 배치도 등을 보면 주요 저항진지 54곳, 전진거점 18곳, 위장진지 21곳, 최후 저항진지 11곳 등 104곳의 진지를 구축했다.

이들 진지 가운데 95개가 오름에 있다. 오름에 갱도를 파서 동굴진지를 만들었는데 일(一)자형, 왕(王)자형, 수직형, 미로형 등 구조가 다양했다. 오름마다 2, 3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의 동굴진지가 구축됐다. 전투, 매복, 관측, 통신, 숙식 등의 용도였다. 섯알오름, 셋알오름에는 비행장을 지키는 고사포진지가 들어섰으며 성산일출봉을 비롯해 송악산, 서우봉, 삼매봉, 수월봉 등 해안가 오름에는 해군특공기지용 동굴이 만들어졌다. 해안에서 방어하다가 밀리면 내륙인 한라산에서 전투를 벌인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 진지 구축에 제주 주민들이 동원됐다.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의 2005년 구술채록에 따르면 주민들은 노역 공출이라는 명목 아래 오름으로 나가 흙과 돌을 실어 날랐다. 허기에 시달리면서 위험한 작업을 했다. 일본군은 자동차용 알코올을 얻기 위한 고구마를, 화약원료인 감태와 항공연료로 쓰기 위해 소나무뿌리를 수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동굴진지 구술채록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지역주민들은 대부분 단순 노무 작업을 했는데 이는 동굴진지의 구조를 감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미군이 상륙했을 때 주민들이 동굴 구조를 알려줄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동굴진지를 위해 단단한 암반이 있는 오름에는 폭파 작업을 하면서 굴을 만들었고, 무너지기 쉬운 화산쇄설층의 오름에는 육지에서 차출한 광부를 동원해 갱목으로 지지대를 만들면서 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 동굴진지 활용 방안 필요


1945년 6월 일본 오키나와(沖繩)가 함락되면서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됐다. 다음 타깃이 제주라고 판단한 일본군은 포병대, 공병대, 전차부대 등의 배치계획을 세우던 중 ‘항복 선언’을 했다. 항복 이전에 미군이 제주에 상륙했다면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된 오키나와처럼 참변이 발생했을 수 있다. 일본군이 제주 주민들을 볼모로 삼아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 일본군의 전쟁 무기는 미군에 넘어갔지만 동굴진지, 고사포진지 등의 구조물은 여전히 남았다. 동굴진지가 농사용 창고로 활용되기도 했고 갱목으로 썼던 나무를 빼다가 집을 짓는 데 쓰기도 했다. 제주시 사라봉, 별도봉 진지동굴은 한때 청소년들의 놀이공간이었는데 일부는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중산간(해발 200∼600m)지대 오름에 구축됐던 동굴진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입구가 수목으로 덮이거나 무너져 내린 곳도 많다.

10일 성산일출봉 인근 해안에서 만난 80대 해녀 할머니는 “물질을 하다가 몸이 얼면 나와서 굴(동굴진지)에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곤 했다”며 “성게 알을 채취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굴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가지 않고 현대식 어촌계 건물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어승생악, 성산일출봉, 셋알오름, 가마오름, 서우봉, 송악산 등지의 동굴진지는 등록문화재가 됐고 비지정 동굴진지 가운데 일부는 올레코스나 오름탐방 코스에서 볼 수 있다.

강만생 제주역사문화진흥원장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비등록 일제 군사시설 전수조사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후속 조치가 없다”며 “아픈 과거도 역사인 만큼 교훈적인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활용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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