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제 앞에서 좌고우면하는 공수처장 원칙대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결기 필요
장택동 논설위원
지난해 말 염정공서를 롤 모델로 삼았다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첫 수장으로 지명돼 언론 앞에 선 김진욱 처장은 차분하고 정제된 모습이었다. 수사 경력이 거의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원칙주의자’ ‘외유내강형’이라는 세평(世評)은 의미가 있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 외부의 압박을 견뎌낼 결기가 첫 공수처장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그는 여야 의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소신 있는 자세를 보였다. 그가 “여당 편도 아니고 야당 편도 아닌 오로지 국민 편만 들겠다”(취임사)는 교과서적인 발언을 실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권의 신뢰를 받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이른바 ‘황제 조사’는 경험 미숙으로 빚어진 일로 넘기기 어렵다. 피의자 신분인 이 지검장을 제대로 조사하거나 아니면 조사 없이 검찰로 재이첩하는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런데 조사는 하되 출석할 때 관용차를 내줘 출입기록이 남지 않도록 배려했고, 조사 장면을 녹화하거나 진술조서를 남기지도 않았다. 예우는 지나쳤고 조사는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상황이 돼버렸다.
일단 설립된 이상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수처는 제 몫을 해야 한다. 카터가 염정공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듯 신생 조직은 첫 수장의 역할이 안정적 존립의 열쇠가 된다. 그런데 벌써부터 김 처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중견 법조인은 “김 처장이 좌표를 잃은 것 같다. 본인의 신망에 따라 앞으로 공수처가 어떤 위상을 가질지가 달라질 텐데 그 무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고 아쉬워했다.
여권이 사활을 걸고 만들어낸 공수처의 첫 수장으로서 김 처장이 부담을 느낄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행보는 위태로워 보인다. 김 처장이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도산 안창호 선생은 “튼튼한 뿌리 위에 좋은 꽃과 열매가 있다”고 했다. 공수처의 뿌리를 만들 의무가 김 처장에게 있다. 난제 앞에서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아니라 원칙에 근거해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강단을 보여야 소명을 완수할 수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