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한 조각/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 지음·이은선 옮김/384쪽·1만5000원·문학동네
소설 ‘세상의 한 조각’을 쓴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에게 영감을 준 앤드루 와이어스의 그림 ‘크리스티나의 세계’(캔버스에 템페라, 1948년.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저자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한 조각’은 허구”라면서도 “실제 역사적인 사실을 최대한 살렸다”고 밝혔다.
미국 국민화가로 불리는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가 명성을 얻게 된 건 그가 31세인 1948년에 내놓은 이 그림 ‘크리스티나의 세계(Christina‘s World)’ 덕분이다. 그림 속 모델은 미국 메인주에 살던 애나 크리스티나 올슨(1893∼1968)으로 와이어스가 알고 지내던 이웃이자 친구였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던 그녀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했지만 휠체어 사용을 거부했다. 그는 두 팔로 하체를 끌며 기어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와이어스가 영감을 받아 화폭에 담은 그림은 현재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대표 소장품 중 하나다. ‘미국의 모나리자’로도 불리며 지금껏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림은 저자에게도 꽤나 큰 영감을 준 모양이다. 영국 태생으로 미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한 저자는 2013년 소설 ‘고아 열차’로 이름을 알렸다. 다음 작품을 위해 소재를 찾던 중 이 그림을 떠올렸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직접 취재한 실존 인물의 삶을 토대로 거침없이 상상력을 뻗어냈다. 공교롭게도 미국 메인주에서 유년을 보내 그림 속 풍경이 익숙했던 저자는 후에 ‘크리스티나’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림 속 모델에 묘하게 이입했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주인공 크리스티나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활기가 넘쳤다. 왕복 5km가 넘는 거리를 걸어 등교했고 학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큰 농장을 짓고 살았던 그녀의 가족에겐 노동력이 더 절실했다. 학업을 중단한 채 그녀는 결국 집안일을 도맡았다.
와이어스와의 만남은 휴가 차 메인주 쿠싱에 놀러왔던 소녀 뱃시의 소개로 성사됐다. 처음엔 인근 풍경, 집 그리기에 관심이 있던 그는 크리스티나 내면에 숨쉬고 있던 세상에 대한 갈망을 포착했다. 그녀에겐 매일 보는 집, 언덕, 들판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와이어스의 그림에서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외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농가의 목가적 풍경 속에 묻어나는 인간의 세심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최근 영화 ‘미나리’에서 의상감독을 맡은 한국계 디자이너 수재나 송도 그림 속 크리스티나로부터 영감을 받아 극 중 모니카(한예리)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밝혔다. 그림이 갖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활자로 느껴보고 싶다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