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대국은 대국답게” 美 비난 文 “신기술 아시아 국가 간 협력 강화” 美와 소원해지면 K반도체 앞날 캄캄
천광암 논설실장
이날 포럼에는 문재인 대통령도 영상을 통해 축사를 했다. 문 대통령의 축사는 시 주석이 미국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자리에서 이뤄졌다는 점, 지금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한 달가량 앞두고 백신 지원 등 민감한 이슈를 조율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만으로도 적절치 않았다. 이 포럼의 부제가 ‘글로벌 거버넌스와 일대일로 협력의 강화’였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과연 축사를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든다.
‘일대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광대한 지역에 중국 주도로 철도 도로 통신망 등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다. 명목은 인프라 개발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패권을 확장하려는 시도다. 미국으로선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다. 한 달 전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일대일로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에 나설 것이라고 선언한 터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의 최근 행보는 문 대통령의 발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스가 총리는 16일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5G와 차세대 모바일 네트워크 분야 협력을 위해 45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또 반도체 등 민감한 공급사슬에 대해 상호협력을 약속했다. 모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미중 경제 관계는 ‘디커플링(Decoupling)’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쉽게 말하면 커플처럼 함께 돌아가던 미중 경제가 남남처럼 따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디커플링은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첫째, 공급사슬(Supply Chain)의 분리다. 중국이 전 세계 제조업의 공급사슬을 잠식하다시피 했는데 반도체와 차세대 통신 등 몇몇 분야는 중국과 분리된 공급사슬을 미국 주도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특히 군사적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큰 첨단기술에 대해서는 중국으로의 유입을 철저하게 막겠다는 것이다. 둘째, 공급사슬의 원활한 작동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미국 기업들과 첨단 분야 해외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적극 장려한다는 것이다.
이날 시 주석 연설의 진짜 의도는 미국 주도의 ‘디커플링’을 공격하는 데 있었다. 시 주석은 디커플링이 경제법칙과 시장원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디커플링은 상당 부분 중국이 자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2015년 발표한 ‘제조 2025’ 청사진도 원인 중 하나다. 기존 제조업에 대한 독식으로 모자라 반도체 통신 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분야도 중국의 ‘붉은’ 공급사슬로 옭아매겠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추진하는 과정 또한 중국 정부가 민간 기업에 천문학적인 보조금과 저리의 융자금을 지원하는 등 불공정으로 얼룩졌다. 중국 내 외국투자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 강요, 중국 시장에 대한 장벽 세우기, 지식재산권 도용 등의 ‘반칙’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의 디커플링은 우리 정부와 기업이 서둘러 적응하지 않으면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 있는 변화다. 특히 한국 수출의 18%를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은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한국은 메모리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주요 장비와 소재도 미국과 일본 등으로부터의 수입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미국 일본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의 지나친 친중 행보가 가뜩이나 갈 길 바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