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우 첫 아카데미 연기상]세가지 키워드로 본 연기 인생-작품
① 에로티시즘
② 생계형 배우
③ 비전형적 할머니 연기
윤여정(74)은 스스로를 ‘생계형 배우’라고 말한다. 홀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단역이라도 닥치는 대로 맡았던 그는 “배가 고플 때 가장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밝히기도 했다.
윤여정의 모성애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헌신적인 사랑의 결과물이었다. 그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일을 하며 세 딸을 홀로 키웠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공부를 한 자신을 ‘스타’라고 부른 어머니를 위해 윤여정은 탤런트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한양대 국문과 진학 후 김동건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선물을 전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방송국 관계자는 배우를 해보라고 권했다. 윤여정은 1966년 TBC 3기 탤런트 공채시험을 통과하면서 55년의 연기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 윤여정과 에로티시즘
어머니를 향한 효심에서 출발해 배우의 길로 접어든 윤여정에게서 감독들은 ‘에로티시즘’을 봤다. 그의 진가를 처음 알아본 고(故) 김기영 감독도 그랬다. 서구적인 마스크와 허스키한 목소리에 매료된 김 감독은 당시 신인이던 그를 ‘화녀’(1971년)와 ‘충녀’(1972년)의 주연으로 발탁했다. 두 영화에서 윤여정은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당돌한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화녀에서는 주인집 유부남과 바람이 난 가정부를 연기했고, 충녀에서는 아내의 권위에 눌려 발기부전을 겪는 남자의 후처가 돼 그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명자를 연기했다. 감정의 극단을 건드리는 감독이자 ‘기인’으로 불린 김 감독은 윤여정을 “유일하게 내 말을 알아들은 배우”라고 평하기도 했다. 화녀로 윤여정은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스페인 시체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20대의 윤여정으로부터 에로티시즘을 이끌어낸 이가 김 감독이었다면 중년을 맞은 윤여정의 숨은 에로티시즘은 임상수 감독의 손에서 빚어졌다. 임 감독의 ‘바람난 가족’(2003년)에서 윤여정은 성불구 남편을 놓고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맺고 자식들에게 “나 섹스도 한다”고 말하는 홍병한을 연기했다.
윤여정은 ‘돈의 맛’(2012년)에서 모든 걸 가진 대한민국 상류층 노인 백금옥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그는 김강우가 분한 주영작과의 정사신도 감행했다.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2016년)에서는 2만∼3만 원을 받고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했다.
○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
김기영 감독부터 해외 유수 영화제에 진출한 임상수 감독까지 실력파 감독들의 페르소나로 낙점된 윤여정이지만 그에게도 설움의 시절은 있었다.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직후인 1974년 미국행을 택한 윤여정은 이혼 후 1985년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덟. 화녀 흥행에 이어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주연으로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11년의 긴 공백기를 딛고 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독특한 목소리 탓에 호불호가 갈렸던 그는 이혼녀 낙인까지 찍히면서 ‘비선호도 연예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TV에 나올 때 “목소리가 듣기 싫다” “저 여자는 이혼녀다. TV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시청자 전화가 걸려올 정도였다.
자칫 비호감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던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왕년의 윤여정’을 내려놓고 철저히 생존을 위해 연기한 강인함이었다. 홀로 두 아들을 키워야 했던 그에게 연기는 돈을 버는 생계수단이었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신인 시절을 뒤로하고 단역까지 닥치는 대로 맡았다. 윤여정은 한때 MBC ‘전원일기’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는 2009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는 생계형 연기자예요. 연기자가 가장 연기를 잘할 때는 돈이 궁할 때예요. 배가 고프면 뭐든 매달릴 수밖에 없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드라마의 대모’ 김수현 작가도 그가 자리를 잡는 데 힘을 보탰다. 김 작가의 데뷔작 ‘무지개’(1972년)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미국에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김 작가는 방송가에서 그를 기피할 때 윤여정을 파격적으로 캐스팅했다. 윤여정은 김수현과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등 많은 작품들을 함께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주연의 엄마 또는 이모였지만 먹고사는 것이 급했던 윤여정은 주·조연이나 단역을 가리지 않았다.
○ ‘비전형적 할머니’로 제2 전성기
“정작 내가 할머니 나이가 되면 (대본을 못 외워서) 할머니 역할은 못 맡을 것”이라고 말했던 윤여정. 그의 우려와 달리 윤여정은 70세가 넘어서도 ‘비전형적 할머니’ 캐릭터를 만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고령화 가족’(2013년)에서는 세 자녀를 묵묵히 키워낸 강인함과, 담벼락 사이에 핀 꽃을 보며 설레는 소녀 감성을 동시에 가진 엄마를 연기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송해성 감독은 “윤여정이 가진 소녀 같은 이미지 때문에 캐스팅했다. 그에게는 나이가 없다. 할머니, 엄마가 아니라 윤여정 그 자체”라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에 숱하게 나오는 치매노인도 그가 연기하면 뻔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18년)에서는 치매인지 아닌지 불분명한, 미스터리한 치매노인을 연기했는데, 10분 남짓의 짧은 출연분량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윤여정은 늘 겁 없고, 정통적이지 않은 여성상을 연기해 왔다. 순박한 시골 처녀가 팜파탈로 변신하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휩쓴 뒤 전통을 뒤흔드는 역할을 맡아 왔다”고 평가했다.
이 매체는 ‘미나리’에서 그의 연기에 대해 ‘비전형적인 할머니’라고 정의했다. 윤여정은 미나리에서도 적극적으로 순자라는 인물을 구축했다. 밤을 깨물어 뱉은 뒤 손자에게 건네는 장면도, 손자와 함께 미나리가 심어진 곳을 찾아간 장면에서 “원더풀 미나리!”라고 외치는 대사도 그가 낸 아이디어다. 손주의 마운틴듀를 뺏어 먹고, 욕설을 내뱉기도 하지만 심장병을 앓는 손자를 위해 기꺼이 침대를 내주는 ‘순자’ 역할로 윤여정은 74세의 나이에 할리우드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에 섰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