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형 '디폴트 옵션' 도입 논의
허진석 논설위원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1%대
규모는 커지는데 수익률이 낮아 문제다. 수익률이 낮으면 노후 안전장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퇴직연금의 최근 5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1.8%대로 국민연금(5.3%)보다 낮다. 적립금의 대부분(86.1%)인 219조9000억 원이 원리금 보장 상품에 가입돼 있고, 실적배당 상품에는 10.7%(27조4000억원)만 투입돼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기업이 운용을 책임지는 DB형도 손실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적립금의 대부분(95.5%)을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2019년 현재 위탁운용 비중을 40.5%까지 늘린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11.3%로 2.3%가량인 퇴직연금의 약 5배에 달한다.
‘예금 상품’ 옵션 도입 논란
디폴트 옵션은 DC형에 새로 가입했거나 기존 투자 상품이 만료된 가입자가 투자 상품을 선택하지 않는 특수한 경우에 적용된다. 4주 이내에 새 상품을 선택하지 않으면 사전에 가입자나 사용자(기업)가 정한 상품에 투자됨을 통지하고, 그럼에도 2주 내에 운용 지시가 없으면 해당 상품에 투자된다.관건은 디폴트 상품(사전 지정 상품)에 원리금이 보장되는 저축성 상품을 넣느냐는 것이다. 안호영 의원이나 김병욱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안에는 실적배당 상품만 있고,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안에는 저축성 상품도 있다.
수익률 제고 취지에 맞추려면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은 넣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이나 호주 등이 그런 방식으로 연 7%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회원으로 두고 있는 금융투자협회 측은 “가입자가 상품 선택 때 예금을 선택할 기회가 있는데,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다시 넣는 것은 수익률 제고를 위한 제도 개선 취지를 무색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도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을 때는 저축성 상품에 자금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계층 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금융지식이 부족하고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높은 위험에 노출되는 점 등 소득 계층 간의 불평등 문제도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디폴트 상품 수수료 낮춰야
여야 모두 디폴트 옵션 도입 자체에는 이견이 적어 앞으로 연금시장에는 디폴트 상품이 새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운용사들이 미국에서 인기 있는 타깃데이트펀드(TDF) 형태로 엄선한 새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TDF는 만기에 가까워질수록 안전자산 비중을 높여 수익성과 안정성을 같이 추구하는 상품이다.디폴트 상품은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려는 DC형 가입자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은 2600여 펀드에서 직접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 이후 디폴트 상품 가입자가 급증했다. 다만,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수수료를 낮추고, 이해충돌을 감시할 수 있는 별도 장치를 갖추는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미국, 퇴직연금으로 100만 달러 자산 형성 노리기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이탈리아 뉴질랜드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은 디폴트 옵션 제도를 이미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호주는 1992년 사용자가 근로자 급여의 9.5%를 의무 적립하는 강제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 애뉴에이션 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마이 슈퍼’라는 이름으로 디폴트 옵션을 도입했다.
양국 모두에서 디폴트 옵션 행사 때 선택하는 디폴트 상품(적격 연금 상품)은 전문가에 의해 잘 설계된 대표 상품이라는 인식이 높아 DC형 가입자가 투자 상품 선택 때도 이들 상품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일본은 대부분의 국가들과 달리 디폴트 상품에 저축성 상품을 포함시켜 가입자가 원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퇴직연금제도 유형1)확정급여(DB·Defined Benefit)형:
기업이 재원을 금융회사에 적립·운용하고 퇴직 시 근로자는 정해진 금액(퇴직 직전 3개월 평균 급여×근속연수)을 받는 방식.
2)확정기여(DC·Defined Contribution)형:
기업이 매년 임금의 12분의 1 이상을 적립해주고, 근로자가 이를 운용해 최종 수령하는 방식.
3)개인형 퇴직연금(IRP):
퇴직한 근로자가 수령한 퇴직금을 운용·관리하거나, 재직 중인 근로자가 DB나 DC 방식 외에 자기 부담으로 추가 적립·운용해 연금 혹은 일시금으로 수령.
허진석 논설위원 jameshu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