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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 이윤화의 오늘 뭐 먹지?]삼척의 콩갱잇국… 토리노의 자투리 파스타

입력 | 2021-04-28 03:00:00

서울 종로구 소재 이탈리아 식당인 ‘파올로데마리아’의 가정식 요리 ‘아뇰로티 델 프린’. 이윤화 씨 제공


강원 삼척시 고든내마을은 두타산 아래 오래된 산촌지역이다. 옛날 강원도 언저리가 그렇듯 이곳도 척박한 땅으로 쌀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물이 좋아 좋은 콩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평생을 지낸 토박이 어르신들과 옛날 음식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콩요리 비법들만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콩을 어떻게 하면 밥이나 면의 식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경험이 많았다. 두부 만드는 것은 모두 선수 수준이었고, 남은 비지는 떡을 만들어 구워 먹기도 했다. 콩가루를 나물에 고루 섞어 찜통에 찐 뒤 양념장을 끼얹어 먹는 요리도 산나물 개수만큼이나 무궁무진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요리는 콩가루를 넣어 끓인 국이었다. 마을에서는 ‘콩갱이’라고 불렀다.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는 국물에 콩가루를 넣었을 때 끓어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기술에 남다른 연륜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따로 있었다. 콩갱이의 마지막 간을 소금도 간장도 아닌 묵은 김치 국물로 하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백김치 국물이 들어가면 흰콩갱이가 되고 붉은 김치 국물이 들어가면 빨간 콩갱이가 된다. 이렇게 완성된 콩갱이를 앞에 두고 맛있다, 맛없다를 떠나 잠시 숙연해졌다. 김치 국물조차도 요긴하게 사용한 것이다.

얼마 전 심플한 자연 식재료의 조합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파올로 데마리아 셰프를 찾아갔다. 마침 이탈리안 피클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주재료인 애호박은 겉 부분만 사용하고 콜리플라워도 잎만 써서 두툼한 가운데 줄기가 남았다. 셰프는 배고픈 이의 눈빛을 읽었는지 즉석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준다며 남은 호박 속살과 콜리플라워 줄기를 올리브오일에 볶은 뒤 수증기로 부드럽게 익히고 갈아서 멋진 파스타 소스로 변신시켜 놓았다. 그리고 토마토의 얇은 껍질도 버리지 않고 건조시켜 요리 마지막의 장식으로 사용했다. 평소 내가 쓰레기통에 버리던 재료들이었다. 피클의 조리법보다 ‘자투리 파스타’가 기억에 더 남았다. 삼척 콩갱잇국을 만든 선조와 닮은 이탈리아 셰프의 지혜였다.

그의 고향은 토리노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레스토랑 이름도 셰프 이름 그대로인 ‘파올로데마리아’다. 그곳 메뉴에는 계절과 상관없이 먹을 수 있는 ‘아뇰로티 델 프린’이 있다. 토마토소스와 고기가 들어간 작은 만두 모양의 파스타로 셰프의 할머니가 일요일에 주로 만들어주던 가정 음식이란다. 우리도 두부, 김치 등 집마다 만두소가 다르듯 이 요리 역시 도톰한 반죽피 안에 집 안의 식재료들을 지혜롭게 활용한 개성 넘치는 홈메이드 음식이리라.

한국 음식에 종종 젓갈이 들어가 시원함을 내듯 파올로 셰프도 엔초비(멸치젓과 유사)를 자주 사용해 깊은 맛을 낸다. 느림의 발효 음식인 한국 간장과 이탈리아 발사믹(포도주 식초) 역시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요리 경력 40년이 넘는 그와의 대화는 이탈리아와 우리 음식의 차이를 찾기보다 상호 깊이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시간이 됐다. 그가 식당 인근에 요리아카데미(IFSE KOREA)를 운영하는 점도 이런 식문화 철학을 전달하는 것에 대한 남다른 소명의 고마운 실천이라 하겠다.

이윤화 음식평론가·‘대한민국을이끄는외식트렌드’ 저자 yunal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