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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와 ‘그분’의 30년 질긴 인연[김종석기자의 퀵어시스트]

입력 | 2021-04-28 11:57:00


경기 종료 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김승기 KGC 감독(오른쪽)과 전창진 KCC 감독. KBL 제공



프로농구 KGC 김승기 감독(50)은 4강 플레이오프를 3연승으로 통과한 뒤 ‘그분’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어떤 팀 감독과 맞붙고 싶으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였다. 김 감독은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주신 ‘그분’, 누군지 아시지 않느냐. 그분과 정면으로 붙어서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KCC 전창진 감독(58)을 에둘러 언급한 것이다.

당시 KCC는 전자랜드와의 4강전에서 2연승을 달리고 있어서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1승만을 남겨둔 상태. 그분과 만남은 금세 성사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을 끝으로 농구단 매각을 결정해 농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될 전자랜드가 인천 안방에서 2연승을 달려 이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분’ 발언이 전자랜드의 마지막 불꽃을 일으켰다는 분석도 나온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처럼 전자랜드의 투지를 자극했다는 해석이다.

이제 29일 전주에서 열리는 최종 5차전 승자가 김승기 감독이 이끄는 KGC와 맞붙는다.





● 3개월 공 들여 김승기 스카우트한 전창진



김승기 감독과 전창진 감독은 용산고 8년 선후배 사이. 전자랜드 유도훈 감독(54) 역시 용산고 동문이다. KGC와 4강전을 치른 현대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경복고 출신이지만 중학교는 김승기, 전창진, 유도훈 감독과 같은 용산중을 졸업했다. 이번 시즌 4강전이 용산중 동문회가 됐다.

본인의 말대로 김승기 감독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는 누구보다 전창진 감독과 인연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농구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김 감독과 전 감독은 엮였다.

삼성 선수 시절 김승기 감독. ‘터보가드’로 이름을 날렸다. 동아일보 DB



용산고 졸업 후 1990년 중앙대에 입학한 김승기 감독은 ‘터보가드’로 이름을 날리며 홍사붕, 양경민 등과 실업팀을 위협하는 대학농구 강팀을 이뤘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김 감독은 키는 182cm에 불과하지만 한 박자 빠른 패스워크와 3점슛 성공률에서 발군의 기량을 과시해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실업팀들 간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의 표적이 됐다.

선수 김승기는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삼성전자 입단을 확정지었다. 김승기가 도장을 찍는 데는 전창진 감독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 시절 전창진 감독은 삼성전자팀 주무로 농구단 온갖 살림을 도맡아 했다. 선수단 관리, 스카우트, 홍보 등 1인 다역을 맡은 그는 깔끔한 일처리와 탁월한 능력으로 이름을 날려 ‘세계적인 주무’로 불리기까지 했다. 전창진 감독의 3개월여에 걸친 ‘그림자 설득’ 끝에 김승기는 “모든 건 형(전 감독)이 다 알아서 해 달라”는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터보가드’ 김승기는 삼성전자 입단 계약금으로 1억5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입단 후 국가대표로도 이름을 날린 김승기는 1997년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28년 만에 정상에 오르는데 앞 장 서기도 했다.

KT 코칭스태프로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전창진(오른쪽), 김승기(가운데) 감독. 왼쪽은 손규완 코치. KBL 제공






● 감독 코치로 10년 넘게 한 배



김승기는 1998년부터 TG삼보(현 DB)에서 다시 전창진 감독과 재회한다. 전 감독은 최희암 당시 연세대 감독을 삼성 사령탑으로 영입하는 문제에 휘말려 갈등을 겪다가 홀연히 삼성을 떠났다. 전 감독은 용산고 출신이 구단주, 사무국장 등 요직을 맡고 있던 TG로 옮겨 최종규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변신해 지도사 수업을 쌓기 시작했다.

김승기는 TG 시절 감독으로 승격한 전창진 감독의 지도 아래 선수로 뛰다가 2003년 모비스로 트레이드 된다. 허재, 김주성 등 황금멤버를 갖춘 TG가 우승한 뒤 연봉 문제로 김승기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모비스에서 뛰다가 2005년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김승기는 전자랜드 이적이 무산되면서 농구 인생을 마감할 뻔 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둔 실직가장이 될 위기에서 전창진 감독이 손을 내밀어 재영입하기에 이르렀다.

2006년 TG를 인수한 동부에서 계속 지휘봉을 잡은 전창진 감독은 은퇴한 김승기를 코치로 받아들여 3시즌을 함께 했다. 전 감독이 KT로 옮긴 2009년부터도 김승기는 코치로 2015년까지 한솥밥을 먹었다. 두 사람이 감독과 코치로 호흡을 맞춘 세월만도 10년이 넘는다. 이 시기에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결정전 정상 등극 등 기쁨의 순간도 함께 맞았다.

이번 시즌 KCC를 프로농구 정규리그 1위로 이끌며 역대 최다인 6번째 감독상을 수상한 전창진 감독. 동아일보 DB







● 호형호제 관계에서 서로 다른 길



전 감독은 2015년 다시 KGC로 옮기면서 김승기와 함께 새 둥지를 찾았다. 하지만 전 감독이 승부조작 의혹으로 수사까지 받으면서 KGC 감독 부임 후 몇 개월 만에 자진사퇴했다. 전 감독이 떠나면서 김승기 감독이 감독 대행을 거쳐 KGC를 이끌게 됐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심한 균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운한 감정과 오해가 교차하면서 한때 감정 대립 양상까지 보였지만 지난해 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뒤 원만하게 회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 감독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은 뒤 KCC에서 복귀할 수 있었다. 2019년 KCC 감독에 오른 전 감독은 이번 시즌 팀을 정규리그 1위에 올려놓으며 감독상을 수상했다. TG와 KT에 이어 프로농구 사상 최초로 3개 팀을 정규리그 1위로 이끈 명장이 됐다. 과거 맹장 이미지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지도력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10년 만에 역대 최다인 6번째 감독상을 받은 전 감독은 “이 상을 죽을 때 까지 간직하겠다”는 소감을 밝힐 만큼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전 감독이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로 고통 받던 야인 시절 김 감독은 KGC를 최강으로 이끌며 우승 반지를 끼기도 했다. 이런 영광을 안기까지는 김 감독의 표현대로 전 감독 밑에서 터득한 지도력도 큰 힘이 됐다.

전창진 감독이 이번에 챔피언결정전에 오른다면 김승기 감독과는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대결을 치르게 된다. 한때 친 동생 같이 여겼던 후배와 하나 뿐인 우승 트로피를 다툰다면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우선은 전자랜드의 절박한 도전부터 뿌리쳐야 한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