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15〉옥 섬돌의 이끼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애비게일의 음모로 앤 여왕의 신임과 사랑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사라. 20세기스튜디오 제공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시인들은 왕의 총애를 잃은 궁중 여인의 애달픈 처지에 공명(共鳴)해 많은 작품을 썼다. 이를 궁원시(宮怨詩)라 부른다. 지난 회에 소개한 궁중 여인의 실제 삶을 소재로 한 궁사(宮詞)와 달리, 이 작품들은 시인이 그녀들의 입장이 돼 슬픔과 고독, 원망과 그리움을 토로한다. 중국 역사에서 제갈량 못지않은 전략가로 꼽히는 명나라 유기(劉基·1311∼1375)는 다음 시를 남겼다.
유기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나라를 세우고 왕조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옥 섬돌의 원망’이란 의미의 제목은 옛 노래를 본뜬 것(악부시·樂府詩)이다. 당나라 이백의 ‘옥계원’이 특히 유명하다. ‘옥계’는 옥석으로 장식된 궁궐 계단으로, 한나라 반첩여(班d여)가 황제의 총애를 잃은 뒤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의 처소를 옥 섬돌의 이끼로 표현한 바 있다.(‘자도부·自悼賦’)
시인은 마치 배우처럼 황제의 사랑을 잃은 여인의 마음을 연기한다. 그녀가 흘린 눈물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옥 섬돌 위에 떨어져 이끼가 되고, 해마다 봄비를 맞고 자라 어느새 궁궐 담장 위까지 올라간다. 봄비는 황제의 은택을 비유하기에 여인은 사랑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를 버리지 않은 듯하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년)에선 앤 여왕과 친구이자 총신인 사라, 그리고 사라의 하녀인 애비게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라는 여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고 여왕과 사랑을 나누지만, 애비게일에게 여왕의 총애를 빼앗긴다. 사라가 여왕의 총애를 회복하기 위해 배신감을 곱씹으며 썼던 편지처럼, 유기 역시 주원장에 대한 애증을 담아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한시와 영화는 모두 관계의 파국을 보여준다. 절대 권력자의 마음이 변해 총애받던 신하는 돌연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흔히 남성 권력자와 피해 여성의 관계로 그려지던 것이 영화와 한시에선 각각의 방식으로 성 역할이 바뀌어 표현된다. 한시에선 파국의 이유가 권력의 비정함에 있음이 드러난다. 과거 지식인들이 궁원시에 공감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