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충녀’. 후처의 딸 명자로 출연하는 윤여정은 자신이 후처가 되는 얄궂은 운명과 맞닥뜨린다. 그의 영화 세계는 바다처럼 넓고, 문제적이다. 한국영상자료원 ‘김기영 컬렉션’ DVD 화면 캡처
※이 글에는 ‘청소년관람불가’ 한국영화 속 문제적 장면이 다뤄집니다. 미성년자는 읽지 마세요.
[1]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2021 교향악축제’에 다녀왔어요. 부산시향의 연주로 라벨의 관현악곡 ‘라 발스’를 듣던 나에게 돌연 현타(‘현실 자각 타임’을 줄인 신조어)가 왔어요. 귀를 즐겁게 하는 우아한 왈츠 음색과 달리 내 눈에 들어온 바이올린, 비올라 연주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노동자’를 방불케 했으니까요. 그들이 얼마나 ‘열나게’ 팔을 휘저으며 현(絃)을 켜던지, 5초에 20번쯤 휘젓는 것 같은 저런 극한의 반복동작을 1시간쯤 더 하다간 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더군요.
맞아요. 예술의 미적 성취는 끊임없는 연습과 반복, 즉 단순노동에서 나와요. 예술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우리가 매일 출근해 죽도록 일하고 월급 받아 생계를 꾸리듯, 알고 보면 예술가들도 먹고살기 위해 예술을 한다고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보세요.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그는 스무 명 넘는 자식을 두었고, 평생 처자식 먹여 살리려 작곡했어요. 65세로 타계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곡까지) 3000여 곡을 지은 것으로 알려지는 바흐이니, 한 살 갓난아기 때부터 죽을 때까지 1주일에 한 곡씩을 쓴 셈이에요. 마태수난곡 같은 마스터피스는 생계비를 벌려 매일매일 토할 만큼 작곡한 ‘존버’(힘들게 버팀을 뜻하는 비속어)의 결과물이었다고요.
그녀의 두 번째 영화인 1972년 작 ‘충녀(蟲女)’를 보았나요? 제목부터 ‘곤충여자’예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후처였던 가여운 집안 배경에서 태어난 여성 명자로 나오는 그녀는 자신 또한 동식이란 남자의 후처가 되는 얄궂은 운명을 맞아요. 강압적인 아내에게 눌려 심인성 발기부전을 겪는 동식을 치료하기 위해 본처는 그녀를 첩으로 영입(?)하는데, 영화는 번식의 욕망이 지배하는 본능세계로 천착해 들어가면서 냉장고 안에서 갓난아기가 나오고, 아기가 쥐를 잡아먹는 섬뜩한 스릴러로 치닫는답니다. 데이비드 린치나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정도가 시도할 만한 기이하고 초현실적인 영화를 그녀는 무려 50년 전 한국에서 자처했다고요! 심지어 마루에 형형색색 알사탕을 뿌려놓고, 그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며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정사 장면마저 마다하지 않지요!
2003년 작 ‘바람난 가족’은 또 어떻고요. 남편 장례식을 마친 뒤 막 집으로 돌아와 손자, 아들, 며느리와 같은 방에서 누워 자던 그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해요. “나 만나는 남자 있다. 나 섹스도 해. 안 한 지 15년 만에. 나 요즘 생전 처음 오르가슴이라는 걸 느껴. 인생은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내 느낌대로.”
와우! 대단하지요? 2012년 작 ‘돈의 맛’에서 재벌가 사모님으로 나오는 그녀는 남편의 바람기에 대항해 젊은 실장(김강우)과 몸을 섞으며 이렇게 외쳐요. “오우, 캄온 베이비. 오우. 길게 오래 해줘야 돼!” 심지어 2016년 작 ‘죽여주는 여자’에선 성기 확장기를 핸드백에 넣어 다니며 남자 노인들을 유혹하는 ‘○○○(자양강장제) 아줌마’로 나온답니다.
[3] 이제 아시겠지요? 이혼 후 오직 두 아들과 가정을 지키며 평생 생계를 위해 연기해 왔다는 그녀의 예술세계가 실제론 얼마나 자유롭고 드넓고 도발적인지 말이에요. 반면 그녀의 전(前)남편이자 그녀의 오스카상 수상에 대해 “그 여자가 나한테 바람피운 남자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한 것 같다”고 말해 비난받았던 남자 가수는 가정을 등한시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아왔지만, 그 스스로 “내 히트곡은 ‘화개장터’ 달랑 한 곡”이라고 말할 만큼 실제 그가 들려준 예술세계는 단조롭고 자기복제적이었다는 사실이지요. 마음이 자유로웠던 윤여정과 몸이 자유로웠던 전남편, 종국엔 누가 진짜 예술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