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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물리학자[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1-04-30 03:00:00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멋진 봄이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 연구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이제 뭔가 시작해보려 했던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잘 풀릴 때도 있고 안 풀릴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연구의 90%는 늘 어려운 상황을 지나가야만 했다. 이들 어려움을 지렛대 삼아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 일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한동안 잠을 못 자고 실험실 구석에 놓여 있는 빈 비커처럼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지내야만 했다.

30년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지도교수와 했던 연구를 하기보다는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은 힘들었지만 그때 학생들이 열심히 해줬고 나 역시 열심히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할 정도로 용기에 의지했다. 깊은 밤, 학교 연구실에 빨리 달려가고 싶은 생각에 잠 못 이루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잠 못 이루는 어느 날 새벽, 입자물리학 연구에 획기적인 실험 결과를 미국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가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립자인 뮤온 붕괴가 전자 붕괴보다 15% 더 적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표준모형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다. 뮤온은 전자보다 약 200배 무거운 입자다. 세상에는 17개의 기본 입자가 존재한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은 이들 입자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이론이며, 2013년에는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두 명의 과학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굳건한 이론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이 결과는 표준모형 이론과 모순되는 실험 결과로, 이 실험 결과가 맞는다면 세상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입자와 제5의 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4가지 기본 힘, 그러니까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말고 제5의 힘이 있다면 과연 어떤 힘일까?

이번에 측정한 실험 데이터의 확률은 99.997%였다. 물리학에서는 발견을 입증하려면 99.9999%의 정확도가 필요하다. 연구팀들은 추가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정확도 0.0029%를 높이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밤잠 없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실패할지도 모를, 무모하다면 무모한 일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그간의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내었기에, 이런 고독하고 대책 없는 열정들이 멋지고 아름답게 여겨지기도 한다.

얼마 전 위층 연구실에 있는 생명공학과 이 교수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데 자기가 돌보는 실험용 개구리가 탈출을 했다며 걱정했다. 실험이 끝나고 고생한 개구리를 위해 숨을 쉬라고 잠시 문을 더 열어주었는데 그 틈으로 개구리가 탈출했다고. 개구리를 못 찾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개구리는 곧 발견되었다. 몸에 멍이 잔뜩 들어 있어 회복실에서 특별식을 먹으며 보살핌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왜 개구리는 탈출을 꿈꾸었을까? 어떤 본능이, 어떤 무모한 용기가 그 개구리를 부추겼을까? 미궁에 빠진 프로젝트건, 뮤온 붕괴이건, 개구리 탈출이건 이래저래 세상만사 쉬운 게 없다. 무엇보다도 부상당한 개구리가 빨리 회복되었으면.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