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해남 녹우당·진도 운림산방
《남도 회화의 산실로 꼽히는 두 집안이 있다. 전남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이다.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유명 예술가들을 배출해냄으로써 ‘예향(藝鄕) 호남’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남도의 정서와 전통을 잘 표현한 이들 집안의 화맥(畵脈)은 한국 회화사에 큰 줄기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명가(名家)에 명인(名人)이 난다고 했던가. 어떤 집터이기에 수대에 걸쳐 걸출한 인물과 재능 넘치는 예인(藝人)들을 연이어 배출한 걸까.》
○ 녹색 빛깔 쏟아지는 녹우당
덕음산 자락에 자리잡은 녹우당 전경.
덕음산 자락의 길지 기운을 받아서였을까. 녹우당에서는 윤효정 이후 내리 10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들을 배출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윤구, 가사문학의 선구자 윤선도, 사실적인 초상화와 풍속화 등으로 조선 중기 사실주의 회화를 개척한 윤두서(1668∼1715)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해남 녹우당의 입향조 윤효정이 심은 수령 500년 은행나무.
○명당 혈(穴) 체험 명소된 사랑채
녹우당 뜰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행랑채와 문간채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건축 구조인데, 안채는
현재 윤효정의 18대 종손(윤형식)이 살고 있어 관람객들의 출입이 제한돼 있다. 채광과 통풍을 위해 지은 솟을지붕이 돋보이는 안채의 마당은 정확히 명당 혈에 해당한다. 이 기운이 안채 부엌 창고 등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면서 식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사랑채는 역사적 명소이기도 하다. 효종이 그의 스승이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 집을 현종 9년(1668년)에 서해 뱃길을 통해 이곳에 몽땅 옮겨 온 것이다.
혈 자리에 서서 사랑채를 바라보면 조선 사대부의 높은 품격 또한 느껴진다. 햇볕을 가리기 위한 겹처마(이중 처마)가 인상적인 사랑채에는 동국진체(東國眞體)로 유명한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 편액을 비롯해 ‘운업(芸業·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 원교 이광사가 쓴 ‘정관’(靜觀·선비는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세계를 살펴 고친다)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녹우당 뒤편은 망자를 위한 공간이다. 재실인 추원당을 비롯해 윤효정의 묘와 사당, 윤선도의 사당이 배치돼 있다. 더 뒤쪽으로는 500여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조성돼 있다. 덕음산의 산향(山香)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다.
녹우당에서는 의외의 인물들이 남긴 흔적도 만날 수 있다. 녹우당 정면에서 오른편에 있는 충헌각 건물은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태어난 생가다. 김용옥의 진외가가 바로 녹우당이어서 그가 이 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 녹우당 왼편 차밭으로 일구어진 터에는 다산 정약용이 그의 어머니와 함께 머물다 간 초당이 있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종손은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공재(윤두서)인데 친정을 그리워하는 손녀를 위해 공재가 초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때의 초당을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운림산방으로 이어지는 예술혼
한폭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진도 첨찰산 자락 운림산방 전경.
허련은 녹우당의 공재화첩을 통해 그림을 모사하며 그림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특유의 남종화풍을 정착시켰고, 남종화를 남도회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허련이 1856년에 지은 진도군 의신면의 운림산방은 바로 그 남종화의 본향이다. 운림산방에서는 200년 남짓 5대에 걸쳐 허형 허건 허백련 등 10여 명의 뛰어난 화가들이 배출됐다. 운림산방 내 소치기념관은 허련과 그 후손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485m) 자락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으로 빠져든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운림산방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터다. 녹우당처럼 앞뒤좌우의 사신사가 뚜렷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터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차분하고도 평온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명당 혈이 맺혀 있는 녹우당 사랑채의 인공 연못.
운림산방을 수호하듯 서 있는 일지매.
해남의 녹우당과 진도의 운림산방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 여행을 권할 만하다. 단, 거리상 하루 코스로는 힘들기 때문에 해남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명량해협(진도대교)을 건너가 진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걸 추천한다.
○가볼만 한 곳
‘신비의 바닷길’ 인근에 있어 밤바다 감상에 좋은 숙박지 쏠비치 진도.
사진·글 해남, 진도=안영배 기자 · 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