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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래오름-영실은 ‘불교문화의 명소’… 해안가는 원당봉 꼽아

입력 | 2021-05-03 03:00:00

제주의 ‘오름이야기’ <5> 사찰





한라산국립공원 볼래오름의 중턱에 자리 잡은 존자암은 조선시대 국성재를 지낼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사찰로, 폐사된 후 한동안 기록에만 남아 있다가 발굴조사를 거쳐 새롭게 건립됐다. 발굴조사 당시 기와, 도자기, 건물터 등을 분석한 결과 존자암은 14∼17세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지난달 25일 한라산국립공원 영실탐방로 매표소 주차장에 들어서니 탐방로와 다른 방향에 ‘존자암지’라고 적힌 팻말과 입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입간판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1km가량 완만한 오르막길 끝에 아담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라산 하천은 대부분 평소에는 말라 있는 건천(乾川)인데 사찰 옆 개울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대웅전 건물을 지나 경사면 윗부분에 석종 모양의 부도(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가 있었다. 투박한 현무암 재질의 연꽃 모양이 정겹게 다가왔다.

이 사찰은 조선시대 국성재(國聖齋·나라의 흥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만큼 위상이 컸던 ‘존자암(尊者庵)’이 있었던 곳이다. 제주대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뒤 현재의 대웅전, 국성재 건물 등이 들어섰다. 1992년과 1996년 발굴조사 당시 기와, 도자기, 건물터 등을 분석한 결과 존자암은 14∼17세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부도는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 초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사료를 보면 조선시대 관리와 선비들은 한라산을 탐방할 때 대부분 존자암을 들른 것으로 나온다. 홍유손(1431∼1529)이 1507년에 지은 ‘존자암개구유인문’에는 ‘존자암은 비보소로 이름이 세상에 난 지 오래다. 음력 4월 길일을 잡아 세 읍의 수령 중 한 사람을 뽑은 다음 암자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국성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임제(1549∼1587)가 1578년 쓴 제주 유람기인 남명소승 등에도 존자암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다.

● 불교문화의 명소 오름

이 존자암을 품은 오름이 볼래오름(해발 1280m)이다. 볼래오름은 부처가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래악(佛來岳)’으로 불리기도 했다. 볼래오름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병풍바위, 오백장군 등과 거대한 분화구 장관이 펼쳐지는 영실이다. 1960년대 영실에 암자를 세웠던 한 스님은 “영실 명칭은 부처가 고대 인도에서 설법했던 영산회랑 또는 영취산에서 유래했으며 병풍바위인 주상절리 기둥은 부처의 제자인 1250명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며 “볼래오름과 영실분화구 일대는 제주지역 대표적인 불교문화 명소”라고 말했다.

볼래오름, 영실이 산악지대 사찰의 대표적인 오름이라면 해안가에서는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을 꼽을 수 있다. 고려시대 원당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원당봉 중턱 터에 5층석탑(보물 제1187호)이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안상(眼象·무늬곽) 내부에 조각한 솟아오른 꽃은 고려시대 탑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으로, 제주에서 직접 만든 현무암 재질 석탑이란 점이 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원당사는 원나라 황실에 공녀(貢女·공물로 바쳐진 여자)로 끌려갔다가 원 순제의 황비가 된 기황후가 태자를 낳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문헌 고증이나 유물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법화사, 수정사와 함께 원당사는 원나라가 고려 말 탐라를 직접 지배할 시기에 세워진 중요 사찰이었다. 원당사 터에 새로운 사찰인 불탑사(조계종)가 들어섰고 분화구에는 원당사(태고종), 문강사(천태종)도 세워졌다. 유서가 깊어서인지 사찰들이 원당봉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고려시대부터 번성한 불교

지난해 말 기준 제주지역 불교 시설은 293곳에 이른다. 제주는 예로부터 ‘당 오백, 절 오백’이라는 말이 내려올 정도로 불교문화와 인연이 깊다. 제주에 사찰이 처음 들어선 기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성 제주불교사연구회장은 “고려 팔관회에 탐라국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고 고려 문종 11년(1057)에는 내륙의 사찰 창건을 위한 벌목과 조영에 탐라민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상당수 노비를 거느릴 정도로 융성했던 사찰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쇠퇴기를 맞았다. 이형상(1653∼1733)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신당(神堂)과 사찰을 없앴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탄압의 시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 제주에서 불교 재건과 함께 사찰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가 1948년 발발한 ‘제주 4·3사건’으로 사찰 35곳이 초토화되는 등 암흑기를 맞았다. 당시 확인되지 않은 사찰 피해도 수두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찰 입지에 풍수지리 중시

제주시 삼양동 원당봉에는 고려 말 중요 사찰인 원당사 터와 함께 5층석탑(보물 제1187호)이 자리 잡고 있다. 원당사 터에는 조계종인 불탑사가 세워 진 후 부근에 원당사(태고종), 문강사(천태종) 등이 들어섰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1960년대 이후 사찰이 재건되거나 새로 만들어지면서 오름에 자리를 잡는 사례가 많아졌다. 조선후기 선승인 초의선사(1786∼1866)가 머물렀던 곳으로 기록된 산방굴사가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주변에는 5곳의 사찰이 새로 들어섰다. 사라봉, 베릿네오름, 가시바위, 인정오름, 파군봉, 수산봉, 고내봉, 단산, 토산봉 등에도 사찰이 입지했다.

오름에 입지한 이유는 우선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풍수지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물, 방향, 사람 등을 조합해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 등의 풍수적 판단과 함께 기(氣) 흐름을 따라 사찰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존자암이 배산임수 형세이고 한라산 골머리오름의 천왕사 역시 옆으로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자리했다. 산속인 탓에 물을 얻을 수 있는지가 사찰 터를 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다만 사찰 풍수는 일반 풍수와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반 풍수가 산 자를 위한 양택(陽宅), 죽은 자를 위한 음택(陰宅)을 구분하는 반면 사찰 풍수는 음택과 양택을 나누지 않는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를 우선 판단하고 수행하는 데 적합한지를 본다는 것이다.

화엄경, 묘법연화경 등에서 묘사하는 극락이나 보살이 상주하는 곳을 사찰 입지로 볼 수 있는데, 시냇물이 흐르고 수목이 있는 골짜기와 숲, 소통이 잘 되는 바른 길이 있는 곳 등이 조건이다.

윤봉택 한국예총 서귀포지회장은 “사찰 터를 정할 때 교통이나 비용 등을 감안하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기(氣)를 중요시한다”며 “기가 강한 곳에 들어서야 사찰이 융성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진수행과 불자의 정성 등도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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