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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모습을 방대한 시공간에 녹여낸 극”…남기애, 연극 ‘OIL’서 열연

입력 | 2021-05-03 14:16:00

배우 남기애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쓰기 시작한 19세기 말. 인간은 이때부터 석유가 주는 뜨거움을 갈망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지독하게 싸웠다. “신은 하필 미개한 중동에 석유를 남겨줬다”는 극 중 영국 장교의 대사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은 석유를 얻기 위해 침략, 약탈도 정당화했다. 석유를 빼앗긴 땅은 차갑고, 황폐하게 식어갔다.

1일 개막해 9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서 공연하는 신작 ‘OIL(오일)’은 19세기 말부터 석유가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2051년까지 역사를 두 모녀관계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영국서 주목받는 극작가 엘라 힉슨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국 연극계 대모 박정희 연출가가 국내 초연을 맡았다.

계급주의, 여성주의, 제국주의, 환경까지 광범위한 이야기를 다룬다. 또한 극단 ‘풍경’의 3개년 프로젝트인 ‘작가展’ 3부작 중 마지막 극으로, 소리꾼 이자람이 ‘메이’ 역할을 맡아 첫 정극에 도전했다. 또 국악 팝 밴드 ‘이날치’의 프로듀서 겸 베이스를 맡은 장영규가 음악을 맡아 화제가 됐다.

풍부한 서사를 품은 이 작품서 전반적 연기 톤을 잡고 배우들을 이끈 건 베테랑 남기애 배우(60)다. 그는 앞서 프로젝트의 첫 작품인 ‘장 주네’서 어머니 역할을 맡았으며, 이번에는 엄격한 시어머니 ‘마 싱거’를 연기한다. 1부에서 열연한 뒤 마지막 5부에 마치 환영(幻影)처럼 등장해 무대를 관조한다. 배우 박명신과 번갈아 역을 소화한다.

최근 더줌아트센터서 만난 남 배우는 “여성의 모습을 방대한 시공간에 녹여낸 극은 볼수록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프로젝트를 마감하는 작품이라 의미가 크다”고 했다. 작품은 영국 콘월과 햄스테드, 이란 테헤란, 이라크 바그다드 등 4개 도시와 200년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았다. 남 배우는 “인물의 구체적 나이보다는 각자 그 시대에 살고 있을 법한 여성의 모습을 연기했다”고 밝혔다.

극 중 며느리는 “엄마는 아기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 해”라고 말하자 시어머니는 “엄마는 가족 모두에게 가장 좋은 걸 줘야한다”며 맞받아친다. 시어머니 역할은 전통적 어머니상이자 고향을 상징하는 존재다. 남 배우는 “기댈 곳 없을 때 찾는 어머니 이미지를 떠올렸다. 인간이 골몰하는 석유도 땅과 자연에서 나오는 산물인데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와 닮았다”고 덧붙였다.

작품서 첫 호흡을 맞춘 이자람 배우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서있기만 해도 믿음이 가고 에너지가 정말 큰 배우”라며 “아직 어머니로서 경험이 없는 그에게 자녀를 키워본 현실적 경험을 들려줬더니 이를 영민하게 잡아내 작품에서 소화했다”고 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인 남 배우는 졸업 후 결혼, 출산으로 꽤 오랜 시간 무대와 담을 쌓고 살았다. 서른일곱인 1997년도에야 뒤늦게 데뷔했다. “잊고 살던 무대에 선다니 얼마나 좋았던지….” 육아와 연극을 병행하던 그는 6~7년 전부터 매체연기에 도전했다. 송혜교 배우가 “실제 제 어머니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송 배우의 어머니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연극에선 늘 착한 엄마를 맡았는데 매체에선 조금은 독특한 엄마를 맡아 좋았다”고 했다.

공연 초반, 후반에 등장하는 그는 준비과정서 후배들의 모습을 객관화해 바라봤다. “작가는 이 순간 왜 이 인물을 등장시켰나”를 떠올리며 제작진, 연출과 상의를 거쳤다. 불필요한 장면을 걷어내기로 했다. 배우라면 조금이라도 오래 무대에 서고픈 건 인지상정. 논의 끝에 그는 결단을 내렸다. 마치 모든 걸 퍼주는 어머니처럼. “제 분량을 제일 많이 줄이기로 했어요(웃음). 작품을 위해서라면….”

김기윤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