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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덤에서 나온 광개토왕 그릇[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1-05-04 03:00:00


[1] 둥근 손잡이와 함께 표면에 선 무늬가 있는 전형적 고구려 청동 호우. [2] 바닥 면에는 세로로 4줄에 걸쳐 16글자가 새겨져 있다. [3] 이를 확대해 보면 ‘광개토왕’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4] 호우총 주인공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반지. [5] 신라 왕족이 사용한 청동제 이동용 소변기인 청동 호자. [6] 허리춤에서 출토된 금동제 용무늬 큰 칼 장식. 국립중앙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1946년 5월 3일, 국립박물관은 경북 경주시 노서리에서 신라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광복 후 실시한 첫 발굴이었다. 이 발굴에서는 고구려산 청동 그릇 한 점이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으니 그것이 바로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호우(壺우)다. 호우란 고구려인들이 뚝배기처럼 생긴 그릇을 지칭하던 이름이다. 해방정국이라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국립박물관은 왜 유적 발굴을 추진했고, 왜 경주의 폐고분을 대상으로 선정했을까?

○ 하나의 무덤처럼 보인 폐고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은 독일에서 고고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김재원에게 총독부박물관 인수와 국립박물관 개관 업무를 맡겼다. 그와 함께 총독부박물관의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주임에 대해서는 국립박물관 개관 때까지 업무 인계를 명분으로 출국을 금지했다. 그해 12월 3일, 새 박물관이 문을 열었지만 아리미쓰는 여전히 돌아가지 못했다. 그에게 ‘한국 연구자들에게 발굴 기술을 지도하라’는 새로운 임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김 관장에게 경주 노서리 140호분을 발굴 대상으로 추천했다. 그간 신라 고분을 여러 번 발굴한 경험이 있고, 많은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런데 그에겐 이 무덤을 꼭 발굴해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이야기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3년 4월 3일, 노서리 215번지에 살던 주민이 집 마당에 호박씨를 뿌리려고 땅을 파다 금귀걸이 1짝, 은팔찌 1쌍, 금반지 1점 등 유물을 발견해 경찰서에 신고했다. 경찰서에서 유물을 살피던 아리미쓰는 1쌍이어야 할 귀걸이가 1짝만 나오자 의문을 품고 발굴에 나서 나머지 유물을 수습했다. 그 무덤이 140호분에 연접되어 있었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가 이때 발굴한 유물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65년에 환수됐고 그 가운데 귀걸이, 팔찌, 목걸이 등 3점은 보물로 지정됐다.

발굴 대상을 선정하고 막상 발굴을 시작하려니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폐고분 위에 자리한 초가집 두 채에 대한 보상이 지지부진했고 도쿄에 주둔한 연합군총사령부가 발굴은 시기상조라는 반대 의견서를 보내온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발굴에 착수할 수 있었다. 발굴을 시작해 보니 140호분 속에는 무덤 2기가 들어 있었다. 남쪽이 호우총이고 북쪽이 은령총이다. 주민들이 집을 만들기 위해 2기의 무덤 봉분을 깎아낸 다음 평탄화했기에 마치 하나의 무덤처럼 보였던 것이다.

발굴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던 5월 9일 금동제 안장 부속구가 확인된 것을 시작으로 며칠 동안 무덤 주인공의 유해부에서 귀금속 장신구가 쏟아졌다. 맨 처음 확인된 것은 금동관이었다. 금귀걸이, 금팔찌와 은팔찌, 금반지, 용무늬가 조각된 큰 칼 등이 차례로 드러났다. 특히 금반지는 열 손가락에 모두 끼워져 있었다.

○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그릇

발굴의 정점은 5월 14일이었다. 조사원들은 주인공의 발치 쪽에서 금동 신발까지 찾아냈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빼곡히 장식했던 중요 유물은 거의 다 수습한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주인공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청동 그릇을 수습하면서 잠시 소동이 생겼다. 아리미쓰가 그릇의 뚜껑을 먼저 수습한 다음 몸체를 들어올리려 했으나 그릇이 무덤 바닥에 붙어 좀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진 촬영을 전담하던 조사원이 대신 투입되어 두 손으로 그릇을 잡고 힘을 주니 그제야 들려 올라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조사원들은 그릇 바닥에 빼곡히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보고 일순간 탄성을 내질렀다.

자세히 살피니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의 열여섯 글자였다. ‘을묘년(415년), 3년 전 돌아가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추모해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란 저 유명한 고구려의 광개토왕이다. 글자체 역시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는 광개토왕릉비와 같았다.

이 무덤이 처음 발굴됐을 때만 하여도 무덤 연대를 호우가 제작된 41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으로 봤고 무덤 주인공도 고구려와 관련된 사람으로 여겼다. 특히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복호(卜好)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는 신라 내물왕의 아들이자 눌지왕의 동생이며 412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다가 418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때 그가 호우를 가져왔고 그의 사후 무덤에 함께 묻힌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1세기 동안 신라 고분에 대한 학계의 연구 결과 호우총은 415년에서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다음 축조된 것이 분명해지고 있어 호우총의 주인공을 복호로 보기는 어려워졌다. 호우총에 묻힌 인물이 금동관을 썼고 금팔찌나 용무늬가 장식된 큰 칼을 소유한 것으로 보면 신라 왕족 남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누구인지 특정하기는 어렵다.

호우총 발굴은 비록 미군정하에서 일본인 고고학자의 도움을 부분적으로 받아 진행한 것이나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무덤에서 발굴된 호우는 역사 기록이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여백을 채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도 이 유물에는 여전히 밝히지 못한 수많은 수수께끼가 담겨 있다. 이 유물뿐만 아니라 함께 출토된 유물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진행되고 있으니, 언젠가 호우의 비밀이 풀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