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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개인이 대통령과 싸워 이긴다는 것

입력 | 2021-05-05 03:00:00

KBS 이사서 해직된 강규형 교수
1, 2심 모두 이겼으나 상처 커
대통령의 좀스럽고 불공정한 처분
당하는 개인은 큰 고통 겪어




송평인 논설위원

현대사 전공 학자로 클래식 음악 평론에도 조예가 깊은 강규형 명지대 교수를 최근 광화문 근처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4년 전 KBS 이사 해직 사태에 휘말리기 전의 활기와 열정이 넘치던 얼굴은 사라졌다. 보기 좋은 체형이었는데 몸은 마르고 배만 불룩 나와 있었다. 머리는 덥수룩했다. 지친 표정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2017년 감사원 정기 감사를 마친 KBS 이사들을 다시 표적 감사해 업무추진비를 잘못 사용했다는 이유로 이사 전원을 문제 삼으면서 정기 감사 결과를 뒤집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감사 결과를 토대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처럼 한 놈만 팬다는 식으로 강 교수를 찍어 이사직 해임을 건의했다. 문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해임을 재가했다.

강 교수는 문 대통령을 상대로 해직 취소 소송을 냈고 1, 2심 모두 강 교수 손을 들어줬다. 강 교수만이 아니라 KBS 이사 11명 전원에게서 업무추진비 부당 사용 사실이 드러났고 강 교수의 소위 부당 사용 액수가 다른 이사들에 비해 오히려 적은 편이며 KBS에서 업무추진비 부당 사용을 이유로 이사를 징계한 사례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박상기 연세대 교수는 형사정책연구원장으로 있을 때 360만 원을 부당 사용했다가 국무조정실 감사에 적발된 사실이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드러났는데도 법무장관으로 임명됐다. 대통령에게 공정한 잣대는 없었으며 주의를 줄 것, 징계를 할 것, 파면을 할 것 사이의 구별도 없었다.

문 대통령과 싸운다는 것은 단지 대통령과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홍위병 같은 지지자들과도 싸우는 걸 의미한다. 강 교수가 한번은 모 씨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언론노조와 미디어오늘은 강 교수가 오히려 물의를 일으켰다고 주장했고 방통위는 이를 또 다른 해임 사유로 삼았다. 강 교수는 이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민형사재판을 했다. 대법원은 물론 민사 재판부도 상대편의 폭행만 인정했다.

강 교수에게 한 사건이 끝나면 또 다른 사건으로 소장이 날아왔다. 이런 소송이 20여 건에 이른다. 상대편은 소송비를 부담하지 않는다. 노조나 특정 변호사 집단이 도와준다. 이런 경우 일단 ‘소송 괴롭힘’ 때문에 손을 들어버리기 쉽다. 상대편도 그걸 노린다. 소송비로 억대의 돈이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소송 대응 과정에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도 겪는다. 개인에게는 이것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강 교수가 다른 이사들처럼 정권이 원하는 대로 사퇴해 줬으면 별일 없었을 것이다. KBS 이사는 KBS 사장과 달리 봉급이 있는 자리도 아니다. 활동비가 조금 나올 뿐이다. 해직 취소 소송 승소를 바탕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들 받아낼 돈도 별로 없다. 다만 그는 한 사람의 역사학자로 현 정권의 언론 탄압에 대한 분명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싸웠다고 한다.

강 교수가 겪은 일은 이 정권에서는 특이한 것도 아니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겨우 닷새가 지나 수상한 기사가 하나 한겨레신문에 보도됐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법무부 검찰국장과 밥을 먹고 각자 상대편 후배들에게 100만 원씩 돈 봉투를 줬다는 내용이었다. 관행대로 특수활동비를 쓴 것인데도 문 대통령은 직접 감찰을 지시했다. 두 사람은 쫓겨나고 그 틈을 타 윤석열 검사가 등용됐다. 두 사람에 대한 면직 처분은 나중에 법원에서 취소됐다.

기가 막힌 것은 문 대통령이 스스로 서울중앙지검장을 거쳐 검찰총장에까지 앉힌 그를 등용할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쫓아낸다는 점이다. 법무장관은 검찰 인사를 전횡하고 수사지휘권까지 남발해도 뜻대로 되지 않자 검찰이 관행적으로 해오던 재판부 분석을 사찰이라고 트집 잡아 윤 총장을 징계했다. 징계가 청구되자 문 대통령은 망설임 없이 결재했다. 하지만 이 처분도 법원에서 퇴짜를 맞았다.

대통령의 처분이 사자처럼 당당하지는 못할망정 벌레처럼 좀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처분과 싸우는 개인에게 그 싸움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검찰총장조차도 법무부라는 조직이 동원돼 씌운 징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일반인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강 교수의 경우 연금통장 2개를 털었고 몸은 엉망이 됐으며 무엇보다 학자로서 가장 열정적으로 연구할 50대 중후반의 수년을 부질없는 송사(訟事)에 빼앗겼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