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
지난해 2월 뮤리얼 바우저 미국 워싱턴 시장이 유령총 규제 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바우저 시장 앞에 놓인 총들은 경찰이 압수한 유령총들. 트위터
유재동 뉴욕 특파원
보수 성향이 짙은 텍사스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어 수도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의 또 다른 업체에도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업체 역시 “재고가 전혀 없다”며 언제쯤 살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3월 16일 아시아계 6명 등 총 8명이 숨진 남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 연쇄 총격, 같은 달 22일 10명이 숨진 서부 콜로라도주 볼더 식료품점 총격 사건으로 미 전역에서 총기 규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문제는 대형 총기 사고가 발생할수록 총기를 찾는 수요 또한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후에 ‘고유 번호(시리얼 넘버)’가 없어 추적이 불가능한 유령총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련번호 없어 추적 불가능
유령총을 조립하는 데 쓰이는 제작 기계. 유튜브 화면 캡처
대체로 키트의 80%가량은 이미 조립된 상태로 오기 때문에 소비자는 나머지 20%의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된다. 조립 방법 또한 유튜브 등에 널리 퍼져 있어 따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유령총은 특히 추적이 불가능해 인기가 높다. 총포상에서 판매되는 완성총은 고유 번호가 있고 연방정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신원조사도 거쳐야 한다. 총기 사고나 범죄가 일어났을 때 구매자를 쉽게 추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완성총이 아닌 부품은 ‘금속 덩어리’에 불과할 뿐 총기로 간주되지 않아 추적을 피할 수 있다. 누구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총기를 다루면 안 되는 정신질환자와 미성년자, 범죄집단 등이 유령총을 손쉽게 구입해 범죄에 사용한다. 2019년 11월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 한 고교에서 16세 학생이 유령총인 권총을 난사해 2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난해 7월에도 펜실베이니아주 한 식당 주차장에서 50대 남성이 전 부인 등 2명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역시 범행 도구는 유령총이었다. 이 남성은 가정폭력 혐의로 총기 소유가 금지된 상태였다. 지난달 말에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중심가에서 30대 남성이 유령총을 난사해 1명이 죽고 4명이 부상당했다.
추적과 관리가 안 되기 때문에 유령총이 얼마나 퍼져 있는지에 대한 통계도 없다. 미 주류·담배·화기·폭발물단속국(ATF)은 2019년에만 약 1만 정의 유령총을 발견했다. 이 역시 실제보다 훨씬 작은 숫자이며 2년이 흐른 지금은 훨씬 많은 유령총이 넘쳐날 것이라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샌디에이고 경찰 관계자는 지역 언론에 “우리가 현장에서 확보하는 총기 4개 중 1개가 유령총”이라고 토로했다.
규제가 되레 수요 자극
애틀랜타, 볼더 총격 사건 직후인 지난달 8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유령총을 엄격히 단속하겠다”며 유령총을 완성총처럼 규제하는 입법에 착수할 뜻을 밝혔다. 같은 달 28일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도 “범죄자와 테러범도 제작 키트만 사면 30분 안에 치명적인 무기를 가질 수 있다”며 유령총 규제 방침을 거듭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바람이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 다음인 2조에 총기 보유권을 적시한 나라다. 서부 개척을 통해 광대한 국토를 보유한 역사, 각각 개별 국가나 다름없는 50개 주가 모인 연방정부 체계 등이 헌법에 총기 보유권이 등장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미 최대 이익단체로 꼽히는 전미총기협회(NRA)는 물론이고 이들을 두둔하는 야당 공화당에서 총기 규제를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 기자가 문의한 텍사스 온라인 총기업체의 웹사이트에는 “업계와 공화당이 단합해 싸울 준비가 돼 있기에 조만간 법이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수정헌법 2조를 침해하려는 시도에 반대하고 싶다면 기부해 달라”는 공지문이 올라와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총기 규제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총기업계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최근 유령총에 대한 수요 급증 또한 규제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만간 총기 소유가 어려워질 것을 대비해 서둘러 물건을 확보해 두겠다는 심산이다.
합법적 총기 또한 예외가 아니다. 미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미 전역의 총기 판매를 위한 신원조사 건수는 1200만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약 900만 건)보다 300만 건 늘었다. 지난해 이후 인종차별 반대 시위, 코로나19 등으로 미 사회 전반의 불안이 고조된 것 역시 총기 보유 심리를 자극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늘어나는 총기 사고 희생자
총기 규제에 대한 찬성 여론 또한 증가하고 있다. 여론조사업체 모닝컨설트의 4월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는 “지금보다 더 엄격한 총기 규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반대한다”(28%)보다 훨씬 많았다. 특히 응답자의 83%는 “신원조사 범위를 확대하고 정신질환자의 총기 소유를 금지시키는 것을 찬성한다”고 했다.
다만 미 정치 지형을 보면 바이든 행정부의 총기 규제 강화법안 통과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집권 민주당과 공화당은 상원 100석 중 각각 50석을 나눠 가지고 있다. 법안의 상원 통과를 위해서는 최소 60표가 필요하기에 공화당에서 10명 이상의 이탈 표를 끌어내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의회를 통과해도 보수 대법관 6명, 진보 대법관 3명 체제인 연방대법원에서 총기 규제가 위헌 판정을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