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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칙 다 지키면 공사기간 못맞춰” 중대재해법 대비 버거운 中企

입력 | 2021-05-06 03:00:00

[현장과 겉도는 산업안전정책]〈1〉처벌강화에 혼란 커진 건설현장




중대채해철벌법이 내년 1월 시행되지만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사고를 줄이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도권의 오피스텔 공사장에서 한 인부가 한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 줄을 타고 작업 중인 다른 인부에게 페인트 통을 전달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지난달 23일 서울 시내 4층짜리 건물 공사 현장. 한 근로자가 벽에 비스듬하게 놓인 사다리에 올라 천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추락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철제 구조물이 옆에 있었지만 빨리 작업하려고 여기저기 옮기기 쉬운 사다리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날 아침 조회에서 현장 안전관리자가 “흡연은 절대 안 된다”고 경고했지만 담배를 피우며 용접하는 근로자도 눈에 띄었다.

인근 다른 공사 현장도 다르지 않았다. 근로자들은 건물 옥상에 있던 긴 목재를 외벽을 통해 아래층으로 옮기고 있었다. 지상에선 다른 작업이 한창이라 목재를 놓치면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 낙하 우려가 있는 자재는 건물 내부 계단으로 옮겨야 한다는 안전수칙이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한 인부는 “공사 기간을 맞추려면 자잘한 안전수칙까지 모두 지키긴 어렵다”고 했다.

○ 중대재해법 대비 안 된 중소 건설 현장

중대재해처벌법이 내년 1월 시행되지만 일부 건설 현장은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법 시행으로 산업 현장에서 사망 사고 같은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의 경영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등 처벌 수위가 대폭 높아진다. 위험한 작업이 많은 건설사들은 ‘1호 처벌 대상’이 될까 불안해하고 있다. 지난해 산업재해 사망자 882명 중 458명(51.9%)이 건설업 근로자였다.

문제는 인력과 비용이 부족한 중소 건설업체들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시행은 2023년 1월로 미뤄졌지만 현장에선 “언제 시행되든 애초 지키기 힘든 법”이라는 불만이 컸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둘러본 건설 현장 2곳은 모두 50인 미만의 소규모 현장으로 중소 건설업체가 시공을 맡고 있었다. 안전관리 인력 2명이 30여 명에 달하는 근로자의 모든 작업을 일일이 관리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안전관리 인력을 늘리면 인건비 지출이 커져 수익이 줄어든다. 현장소장 박모 씨는 “안전모 착용처럼 생명과 직결되는 기본적인 안전수칙은 지키려 하지만 정해진 공사 기간과 공사비에 맞추려면 못 지키는 것도 적지 않다”고 했다.

○ 대형 현장도 ‘처벌 피하기 힘들 것’ 불안감

지난달 26일 수도권의 한 대규모 아파트 건설 현장. 근로자 1000여 명이 일하는 이곳에서는 안전수칙을 강조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근로자들은 일반 사다리 대신 발판이 있는 사다리인 ‘고소 작업대’를 사용했다. 용접 작업은 화재감시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법에서 정한 최소 인원의 2배가 넘는 인력이 안전관리를 담당하며 근로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런 대형 건설업체도 중대재해법을 완벽하게 대비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25년 경력의 안전관리 담당자 A 씨는 “100번을 잘 지켜도 1번의 실수나 일탈이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늘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지만 현장에서 마주하는 위험 요인은 1만 가지가 넘는다”고 말했다. 현장 근로자들의 소속이 다르고 공정에 따라 배치가 수시로 바뀌다 보니 인력관리도 까다롭다.

대형 건설업체들은 올 들어 안전에 더욱 신경 쓰고 있지만 사망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올해 2월 한 대형 건설사의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화물차에서 하역하던 지게차가 철제 자재를 떨어뜨려 근로자 1명이 깔려 사망했다. 당시 사망자는 현장 근로자가 아니라 자재를 싣고 온 화물차 운전자였다. 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통상 대형 건설업체는 현장 100곳 이상을 운영한다”며 “현장에 드나드는 인력이 워낙 많아 안전관리의 범위가 무제한에 가깝다”고 했다.

○ “처벌 위주로는 안전 보장 못 한다”

전문가들은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지금도 산재가 생기면 사업주나 현장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어 처벌한다. 공사 수주 시에도 불이익을 준다. 지난해 1월 일명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안법 개정안이 시행됐지만 지난해 건설업 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는 2.48명으로 전년(2.08명)보다 늘었다.

현장에서는 산업재해를 줄이려면 적정 공사 기간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간에 쫓기면 안전에 구멍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대형 건설업체 안전관리팀장 B 씨는 “안전관리비가 따로 책정되지만 항상 빠듯해 시공사가 일부 더 부담한다”며 “중소업체들은 이럴 형편도 안 된다”고 했다. 중소업체 사이에선 “법 위반으로 걸리면 폐업”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중소업체를 위한 중대재해 예방 전문기관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대재해법과 유사한 기업과실치사법을 시행하는 영국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은 제도 도입 전부터 건설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건설업 배려 체계’(CCS·Considerate Constructors Scheme)에 따라 현장을 감독하고 우수 건설현장 인증제를 운영하는 등 안전 인프라를 구축했다.

최수영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대재해법 시행까지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불확실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기업들이 대응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며 “명확한 규정과 중소업체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장소장들 “사고나면 우리가 전과범 돼… 치료비 대주고 쉬쉬하는 경우 비일비재”
“정치인-공무원들 현장 전혀 몰라”

“현장 사고로 재해가 신고되면 현장소장은 전과범이 되고 업체는 나중에 공사 수주에 불이익을 받습니다. 이러니 개인 돈으로 치료비 대주고 쉬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공무원이나 정치인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릅니다.”(수도권 한 공사장의 A 현장소장)

지난달 23일과 26일 동아일보가 건설 현장에서 만난 근로자들은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에 대해 하나같이 “법만 만든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근로자 B 씨는 “자잘한 안전수칙을 일일이 지켜가며 일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예를 들어 건설 현장에서 가장 흔한 추락사고는 안전난간을 설치하고 안전고리를 착용하면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현장이 1, 2층인 경우 잘 지켜지지 않는다. 난간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리를 끼웠다 뺐다 하는 게 번거로운 데다 ‘저층인데 괜찮겠지’ 하며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2m 안팎의 높이에서 떨어져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현장소장으로 10년 이상 일한 C 씨는 “오죽하면 전과 없으면 현장소장 제대로 한 거 아니라는 말이 있겠느냐”며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작업하는 건설업 특성상 안전관리자가 근로자를 한 명 한 명 따라다닐 정도로 인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수칙을 지키는지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또 다른 근로자 D 씨는 “처벌받지 않으려면 대기업처럼 해야 하는데, 그건 꿈같은 일”이라고 했다. C 씨는 “안전관리 매뉴얼은 이미 완벽하고, 처벌도 강력하다”며 “지키려면 돈과 인력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점을 정부가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이새샘 기자·정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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