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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동트면 시작되는, 선곡 노동자의 새벽

입력 | 2021-05-07 03:00:00


선곡가 박정용 씨가 최근 낸 음악 추천서 ‘뮤직 포 이너피스(Music For Inner Peace)’. 스마트폰을 활용해 책에 실린 곡들을 편하게 들어볼 수도 있다. 선곡가의 정성, 창의성, 노동 강도는 평론가나 음악가 못지않다. 노웨이브 제공

임희윤 기자

“출근하셨어요?”

한때 같은 분야 현장을 누비던 후배 J가 무려 2년 만에 보낸 메시지. 반가운 문자가 아침부터 휴대전화를 밝힌다.

“당근이지!”

아직 비몽사몽이지만 사기충천인 척 0.5초 만에 답장….

“저 을지로에 있는데 그럼 광화문에서 커피 한잔?”이라고 묻는 후배가 죽을 만큼 보고 싶지만 이럴 때일수록 단호해야 한다.

“나 출근해서 지금 거실인데?”

재택근무의 성패는 바른 출근에 달렸다. 침실부터 거실까지 단 다섯 발짝을 뗀다 해도 위풍당당 ‘Giant Steps’(거인 걸음·존 콜트레인의 1960년 앨범)! 신성한 노동의 전당에 목욕재계, 의관 정제, 용모 단정 상태로 들어서야 한다. 그래야 일이 된다. 뇌가 돌아간다.

#1. 같은 날, K 씨도 재택근무 중이었다. 그의 근무는 오전 7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대 속에서 시작됐다. K는 ‘선곡 노동자’다. 기상과 함께 반사적으로 켜는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출근 완료. 노동자의 새벽은 이렇게 시작된다.

#2. 서울 마포구 공연장 ‘벨로주’의 박정용 대표는 스스로를 요즘 선곡가라고 소개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공연계가 멈춘 데다 실제로 선곡 노동이 수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선곡가라는 명칭을 먼저 쓴 건 일본이에요. 일본 오디오 잡지를 보면 오디오 마니아 중 일류를 ‘오디오 연주가’라고 쓰잖아요. 그만큼 한 분야의 마니아를 대접해 주는 거죠.”

박 씨는 얼마 전 ‘뮤직 포 이너피스’라는 책을 냈다. ‘플레이리스트 가이드북’을 표방한 이 책을 위해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의 유명 선곡가 야마모토 유키 씨가 추천사를 써줬다.

#3. 선곡 노동이라니…. 어쩐지 지하철 한편에 붙은 ‘재택꿀알바. 고수입 보장!’ 전단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저들의 노동 강도는 약하지 않다.

K 씨는 매주 1000곡 이상을 골라 재생 목록을 만들어 모 플랫폼에 ‘납품’한다. 오전 7시에 눈뜨면 노래부터 골라야 한다.

“힘든 점요? 끝없이 다른 노래, 새로운 곡을 골라야 한다는 것. 제가 맡은 시간대는 브런치 타임과 자정 무렵이에요. 평생 음악 들은 저도 늘 더 듣고 더 노력해야 하죠.”

K 씨는 원래 ‘나영석 예능’을 안 좋아했다. 그러나 그 배경음악에서 브런치용 선곡 힌트 하나라도 건지려다 보니 요즘 그런 예능도 곧잘 본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4. 나 역시 파트타임 선곡 노동자다. 이쪽 노동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음원 플랫폼의 내 계정에 이런저런 업무용 플레이리스트 폴더를 만들어 뒀다. 이런 음악을 듣고 저런 영화를 보다가도 매주 다양한 매체에 소개할 만한 음악이 떠오르면 그 폴더에 득달같이 넣어둔다. 지난 수년간 써먹은 것과 겹치지 않는 신선한 선곡 주제를 고안해 내는 것도 고역. 잠자리에 누워서도 옛사랑 대신 선곡을 생각한다. 설혹 옛사랑이 떠오른대도 옛사랑 관련 선곡 아이디어를 챙기는 게 더 보람되다.

#5. “플레이리스트의 시대죠. 유튜브 켜고 ‘시티팝’이라고 치면 그 장르의 새 음악을 10시간이라도 들을 수 있어요. 참 편해요. 근데 다 듣고 나면 뭘 들었는지 기억에 안 남아요. 좋은 음악을 발견하는 재미에 맥락과 의미도 부가했으면 해서 책을 쓰게 됐죠.”

박 씨의 책은 그의 말처럼 양가적이다. 젊은 세대가 열광할 요소가 다분하다. 예스러운 음악 글의 매력도 놓지 않았다. 아침, 오후, 저녁, 밤으로 챕터를 나누고 스포티파이, 유튜브, 애플뮤직과 연동되는 플레이리스트를 QR코드로 첨부했으며 감각적인 디자인을 내세운 것은 2020년대적 매력. 앨범마다 소소한 설명과 소개를 달아둔 것은 LP판 해설지를 읽으며 자란 그 세대답기도 하다. 박 씨는 약 3만 장의 음반을 갖고 있다.

#6. 박 씨의 책에 붙은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또 선곡 노동을 하고 있다. 웃긴 노래, 슬픈 노래, 초여름에 틀 노래, 비 오는 날 어울릴 노래, 약간 우울한 맘으로 강변북로를 일산 방면으로 달리다 골든에일 빛깔 노을을 마주하면서 들을 만한 노래….

매일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를 집어삼키는 인공지능(AI)에 맞서 인간 선곡가들은 오늘도 뛴다. 박 씨의 말에 위안과 희망을 얻는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추천이 역설적으로 ‘학습된 A 사용자의 입맛’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전혀 다른 뭔가를 추천해 주는 힘, 그게 선곡가의 몫이죠. 대한민국에 선곡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네요.”


임희윤 기자 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