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무등산 자락에 있는 양림동 마을에는 유서 깊은 ‘호랑가시나무 언덕’이 있다. 높이 6m 이상에 수령 400년이 넘은 호랑가시나무(광주시 기념물 제17호)가 명물이다. 100여 년 전 이곳을 찾은 우일선(로버트 윌슨) 선교사가 심은 흑호두나무, 은단풍나무 등 아름드리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림동은 100여 년 전 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병원, 학교, 음악, 미술 등 최초의 근대 문화를 전파한 지역으로 ‘광주의 개화 1번지’로 통한다. 광주의 전통과 근대, 최첨단 아트까지 볼 수 있는 양림동은 호젓한 골목길을 걸으며 예술가의 작업실과 카페를 구경할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마침 요즘엔 광주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제1회 양림골목 비엔날레’도 열리고 있다.
●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양림동 골목
올해 시작한 ‘양림골목 비엔날레’는 양림동 마을 전체가 하나의 전시장이 되는 축제다. 양림동에 거주하는 작가와 상인들이 직접 만든 이 축제는 카페와 음식점, 거리에서도 전시를 연다. 거리를 걷다 보면 기발한 아이디어에 여기저기서 피식 웃음이 터진다. 1914년 지어진 오웬기념각은 유진 벨과 함께 양림동에 첫 교회를 설립한 오웬(클레멘트 오언) 선교사를 기려 동료들이 세운 것이다. 이 건물에서 광주의 첫 오페라, 첫 독창회, 첫 연극 공연이 열렸고 첫 시민단체(YMCA)가 태동했으니 개화기 광주 신문화의 요람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이렇듯 일찍부터 서양 근대 문물을 접한 양림동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한 공간으로 ‘광주의 몽마르트’로 불린다.
음악가 정율성과 정추, 시인 김현승, 화가 배동신이 자란 곳이며 소설가 황석영이 ‘장길산’을 썼다. 남도의 화려한 상류층 기와집인 ‘이장우 가옥’ ‘최승효 가옥’과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사택, 선교사들이 지은 기독교병원(옛 제중병원), 정율성 업적과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정율성 거리, 주민들이 폐품을 모아 예술 작품으로 꾸며낸 펭귄마을까지…. 근대와 현대의 다양한 매력이 공존하는 양림동은 두 발로 걸어 다녀야 제맛이다. 양림동 문화기획자 정헌기 아트주 대표는 “광주의 근대에서 최초의 것은 대부분 양림동에서 출발한다”며 “양림동의 정신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양림동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가장 힙한 명소는 ‘이이남 스튜디오’다. 시원스럽게 펼쳐진 통유리창으로 쏟아질 듯 회오리치는 발광다이오드(LED) 영상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제약회사 사옥으로 쓰였던 건물을 개축한 이 스튜디오에서는 전통 회화를 움직이는 디지털 영상으로 표현한 그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유리 천장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에는 ‘다시 태어나는 빛―피에타’ 작품이 설치돼 있고, 루프톱에서 조망할 수 있는 짙푸른 무등산의 풍경이 근사하다.
여행자 라운지인 ‘10년 후 그라운드’는 유치원 건물을 리모델링한 건물.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여행 정보를 얻고, 미술 작품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걸려 있는 다음(茶¤) 김창덕 작가의 ‘윤회매(輪廻梅)’ 작품이 눈길을 끈다., 윤회매 작품조선 정조 때 실학자였던 이덕무(1741~1793)가 밀랍(벌집)으로 만들었다는 윤회매를 재현한 도자화다. 윤회매는 벌이 꽃에서 채취한 꿀로 밀랍을 만들고, 그 밀랍으로 다시 매화를 만들었으니 ‘돌고 도는 윤회’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림동 한옥 카페 ‘윤회매 문화관’에서는 백자에 꽂혀 있는 윤회매를 바라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다.
양림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양화가 한희원(66)은 양림동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한희원 미술관 벽에는 재개발로 무너진 주택가에서 주워온 격자 창틀을 액자로 삼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창틀에 그려진 밤하늘 별이 빛나는 풍경화의 이름은 ‘남광주역을 떠나는 막차’다. 갤러리 내부에는 광주천에서 철거된 ‘뽕뽕다리’(공사장에서 쓰는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를 주워와 만든 테이블도 놓여 있어 미소를 자아낸다.
카페 ‘힐사이드 양림’ 건물 외벽에는 고양이 작가로 알려진 최순임 작가의 ‘꿈의 여행’ 조각 작품이 붙어 있다. 최 작가는 “버려진 고양이를 발견해 키우면서,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고양이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나를 치유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양림동에는 내부에 바위 모서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진짜 동굴이 있는 카페도 있다. 양림역사문화마을 입구에 있는 ‘Cave’다.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의 공습으로부터 대피하기 위해 건설한 방공호다. 동굴카페 옆에는 미술관도 곧 개장할 예정이다.
● ‘생명’과 ‘죽음’을 묵상하는 비엔날레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 언덕에는 수선화, 튤립과 같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호남신학대학의 유수마 목사 사택은 호랑가시나무 창작소로 리모델링돼 예술가들이 상주하며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고, 원요한 목사 사택은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되고 있다. 선교사들이 자동차 차고로 썼던 공간은 전시장으로 리모델링 돼 광주비엔날레 연계 프로그램이 전시되기도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은 후 새벽에 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넘어 양림산 둘레길을 산책했다. 양림동에서 청년기를 보낸 다형 김현승 시인(1913~1975)의 ‘가을의 기도’ 시비를 지나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산책하다 보면 의료 봉사와 교육에 헌신했던 선교사 23인의 묘역이 나타난다. 이 묘역에서 ‘유진 벨’과 ‘서서평’의 이름을 발견했다.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1868~1925)은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개원에 산파 역할을 한 선교사다. 유진 벨 이후로 4대째 126년간 이어지는 후손들은 3·1만세운동, 6·25전쟁 참전 등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조선의 성녀(聖女)’ ‘나환자들의 어머니’로 불린 서서평(1880~1934)은 독일 출신 미국인 선교사 엘리자베트 셰핑의 한국 이름. 1912년 32세 때 조선에 건너와 평생 한센병 환자들과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살다 간 여인이다.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를 비롯해 수많은 아픈 이들을 살렸던 선교사들이 세운 제중원이 있던 양림동 골목 비엔날레의 이번 전시 주제도 ‘생명’이다. 태국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코라크리트 아루나논드차이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죽음과 제주 4·3사건, 최근의 미얀마 사태까지 연결한 미술 작품 ‘죽음을 위한 노래’는 깊은 바닷속 거북이의 울음소리의 애도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에서 열리는 ‘당신의 ㅅㅈㅅㅈ’도 흥미롭다. ‘시간, 죽음, 슬픔, 장례식’이란 4개 단어의 초성으로,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78)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인류의 새로운 문화예술 주제로 꼽은 4개의 키워드다. 타인과의 단절과 고독, 방어막 없는 죽음, 울어주는 이 없는 장례식이 현실화된 상황을 어떻게 예술이 위로해줄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진다.
● 양림동의 화가들
‘무등산 작가’로 불리는 이강하(1953~2008)도 양림동의 대표적인 화가. ‘이강하 미술관’에서는 광주 비엔날레 연계 프로그램으로 남도 풍경과 무등산, 영산강을 그린 이강하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무등산의 봄 풍경에 전통적인 단청 문양, 여성의 누드가 결합된 그의 그림은 초현실적 새로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양림동의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20여 년 동안 수채화만을 그려온 한부철 작가(51)의 작업실도 만난다. 한옥의 문살을 본뜬 철제 대문과 아담한 정원이 예쁜 작업실이다. 한 작가가 요즘 그리는 ‘담다’ 시리즈에는 장독대에 놓인 정화수 위로 꽃잎이 흩날린다.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위로받는 마음을 담은 수채화다.
갤러리 겸 카페인 ‘양지바른’(YANGJIBAREN)‘은 뉴욕과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 엘리 지 양(Ellie Ji Yang)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다. 자신의 팝아트 작품을 비롯해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오리지널 작품이 함께 전시되는 아트샵이자 갤러리다. 빈티지 포스터와 패브릭, 리빙 아이템도 전시 및 판매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