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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하라, 용서한다” 목숨 건 눈치 싸움[주성하의 北카페]

입력 | 2021-05-09 09:00:00


요즘 북한에선 권력과 주민들 사이에 목숨을 건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수할 것인가, 하지 않고 버틸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먼저 배경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지금 북한의 경제 사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제재로 인해 돈을 벌어오던 주요 수출 품목들이 차단됐는데, 여기에 또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1년 넘게 교역마저 차단됐습니다. 올해 2월엔 북한이 무역에서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중국과의 교역 액수가 300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대외무역이 꽉 막힌 결과 북한 내부에서 각종 상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데, 외화를 벌어오지 못하니 구매력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이러다 또 대량 아사 사태가 오는 것은 아닌지 주민들의 불안은 고조되고 있습니다. 또 민생이 어려워질수록 주민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습니다.

권력자는 민중의 불만이 커지는데 자기가 줄 것이 없을 때에는 강력한 망치를 꺼내듭니다.

북한도 예외가 아닙니다. 과거 1990년대 중반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던 시기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을 선포했고 “선군정치로 위기를 헤쳐 나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선군정치란 본질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군부 독제 체제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군을 동원해 불만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은 사례들이 있죠. 1998년 황해북도 송림제철소에서 주민들이 반항하자 탱크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처형으로 진압해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또 6.25전쟁 시기 침투한 적 간첩단이 아직도 준동한다면서 소위 ‘심화조’ 사건이란 것을 조작해 수천 명의 간부들을 처형하고 2만5000여명을 숙청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선 찍히면 죽는다는 공포 분위기에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김정일의 강력한 독재에 근거한 체제 수호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지금 집권 10년 차에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김정은은 아버지가 썼던 카드를 그대로 베껴 쓸 생각인 것 같습니다.

김정은은 지난달 9일 노동당 세포비서대회 폐회사에서 “나는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 각급 당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지금이 위기 상황이란 것을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죠. 굳이 이를 선언한 것은 위기라고 알려야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월 노동당 8차 대회를 시작으로 각종 회의를 부지런히 개최해 간부들과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정신무장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노동당 경제부장도 임명 한 달 만에 날린 것은 ‘찍히면 죽는다’는 공포 분위기를 위로부터 만들어가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수도 평양의 민심을 통제하기 위해 6만6000세대 공사판을 벌여놓았습니다. 국력을 총동원해 완공한다던 원산해안관광지구 공사는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고, 지난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던 평양종합병원 건설도 아직 마무리 못했습니다. 관광단지 하나, 병원하나 완공할 돈이 없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또 어마어마한 공사판을 벌여놓았으니 이상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평양시 건설 카드는 평양 민심, 나아가 전국 민심을 통제하기 위한 속임수이죠. 이것 역시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김정일은 2008년 후계 세습에 착수하는 동시에 “평양에 2012년까지 10만 세대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당시 총동원령이 떨어져 시민은 물론 평양 22개 대학 전체가 문을 닫았습니다. 대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1년 9개월 동안 공사판에 동원됐습니다. “새파란 아들이 또 세습하냐”는 불만을 말할 힘도 없었습니다. 10만 세대 건설을 내걸고 1만 세대도 완공하지 못했지만, 시민들이 건설 중단 명령이 떨어져 안도의 한숨을 쉴 때에는 이미 3대 세습도 마무리됐습니다. 성동격서 작전인 셈입니다.

이번에도 공사판을 벌여 놓고 과제를 수행했느니 못했느니 채찍질하면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할 힘까지 다 빠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5만 세대가 완공될 수 있을지 여부는 김정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를 통제할 명분도 만들고 이목을 돌리기 위한 대형 공사판도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을 보여줄 차례입니다. 그래야 주민들이 겁이 나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려면 명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턱대고 죽이지 않고 정말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 죽였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거든요.

영화를 보면 악당은 “솔직히 말하면 살려주고, 거짓말하면 처참하게 죽일 것”이라는 식으로 늘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습니다.

북한은 3월부터 바로 그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전국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수할 것을 종용하는 각종 강연이 진행됐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살려 준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건 과거의 죄를 캐기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앞으로 사람들을 처형할 때 쓸 명분인 것입니다.

북한 소식통은 지금 북에서 진행되는 내부 강연 자료를 몇 개 보내왔습니다.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행위를 제압소멸하기 위한 투쟁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설데 대하여’라는 강연자료는 ‘중앙비사회주의집중소탕연합지휘부’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조직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조직은 김재룡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 책임진 신설 조직입니다. 이미 4월에 신의주와 함흥을 대상으로 집중 검열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이 자료를 보면 북에서 각종 범죄가 창궐하고 있다고 고해성사를 한 뒤 어느 한 시에서만 고급중학교 학생 9000여명이 불순녹화물을 본 사실을 고백했고, 3000여명이 기억기(USB, CD 등 저장매체)를 바쳤다고 나옵니다. 요즘 검열이 진행되는 신의주 또는 함흥의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강연에는 솔직히 고백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는 사례도 나옵니다.

건강에 해로운 화학제를 대량으로 식품에 섞어 판 여성이 등장하는데, 원래대로라면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솔직히 고백했기 때문에 당에서 재생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주민들은 높은 공민적 자각을 가지고 자수사업에 적극 떨쳐나서자’라는 강연 자료를 보면 북한이 봉쇄 정책을 펴지 않을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설명하며 “한 줌도 안 되는 자들 때문에 너희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앞으로 죽여야 할 사람들은 대중을 고통 속에 빠지게 한 죽일 이유가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수하면 용서해 준다고 해서 주민들이 그대로 믿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있고, 용서 받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또 불법 행위로 돈을 벌었다고 고백하는 경우 그 돈을 범죄 수익이라고 고스란히 빼앗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침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죠. 여러 명이 연루되면 친구들까지 팔아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을 닫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이렇게 이례적으로 자수 바람까지 일으켜 용서할 기회를 주었는데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누구의 밀고로 드러나면 처벌은 훨씬 가혹해지는 것입니다. ‘자수할까, 말까’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5월 들어서 자수 바람이 끝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피바람’이 불 차례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총성을 울려 인민을 두려움에 빠뜨려야 감히 당과 수령을 향해 불평을 하지 못하고 통제에 고분고분 따를 것입니다.

김정은은 집권 이래 고위 간부들은 많이 죽였지만, 일반 주민을 모아놓고 하는 공개처형은 될수록 자제해 왔습니다. 아버지와는 차별되는 인자한 지도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이젠 달라질 것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공개 처형이 진행될 것입니다.

처형되는 사람들은 “당이 준 자수기회를 저버린 역적이며, 대중을 고통에 빠뜨린 원인을 제공한 죽어 마땅한 자”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주성하 기자

여기서 또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간부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고사총과 화염방사기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니 웬만한 처형 방법에는 주민들이 놀라지 않겠죠. 어떤 새로운 끔찍한 처형 방법이 등장해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까요.

3년 전 봄날 판문점에서 수줍은 웃음을 보였던 김정은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그는 지금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과거보다 더 포악한 악당으로 회귀했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