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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인 나도 수가 보이는데, 고수들이 왜…”[이진구기자의 대화, 그 후- ‘못다한 이야기’]

입력 | 2021-05-10 09:43:00

국수 조훈현 편 ①




흔히 정치판을 바둑판에 비유합니다. 사소취대(捨小取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부득탐승(不得貪勝·승리를 탐하면 이기지 못한다) 등 정치판에 인용되는 바둑 교훈도 수두룩하지요. 그래서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조훈현 국수(國手)가 영입됐을 때 당대의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은 정치판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습니다.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둑과 비유해 쓰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요. 이후 매년 한 번씩 4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했습니다. 당시 조 국수(그는 국회의원대신 국수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의 조언을 돌이켜보면 지금 곱씹어 볼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의원 신분이기는 했지만 스스로도 정치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았고, 그러다보니 정치판에 매몰되지 않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판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당대의 국수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과 날카로운 외모 탓에 처음 만났을 때는 다소 기가 죽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그는 굉장히 털털했고, 말도 허세나 꾸임 없이 인정할 것은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첫 만남에서 만약 2002년 한일 월드컵이 2016년에 열렸다면 자신이 아니라 허정무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이 국회의원이 됐을 거라 하더군요. 20대 총선 직전인 2016년 3월 9일 저 유명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있었죠. 당시 이 9단이 알파고에게 1승을 거두면서 엄청난 화제가 됐는데 이것이 새누리당이 조 국수를 영입한 계기가 됐습니다. 바둑 애호가인 원유철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권유했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당시 새누리당 비례대표에는 허 전 감독도 신청을 했었지요. 만약 그 해에 월드컵이 열리고,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했다면 그 인기 덕에 자신 대신 허 전 감독이 됐을 거란 뜻입니다.

첫 인터뷰(2017년 6월)는 그가 의원이 된지 1년 정도가 지난 후였습니다. 그 1년 동안 새누리당에서는 20대 총선 막장공천, 최순실 정유라 사태,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등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요. 그 스스로도 “10년 동안 겪을 일이 1년 사이에 벌어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여당에서 시작해 대통령 탄핵을 겪고, 정권을 빼앗기고, 당명도 자유한국당으로 바뀌고, 인명진 비상대책위원회가 들어서는 등 당이 난리였으니까요.

그는 개별 정치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적을 하거나, 특정인을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둑으로 치면 겨우 죽고 사는 것과 간단한 정석을 아는 정도일 뿐”이라고 했지요. 하지만 “하수인 나도 수가 보이는데, 고수들이 왜…”라며 요즘 표현으로 묵직하게 ‘뼈 때리는’ 지적을 하더군요. 국민의 눈높이에서 상식적인 변화를 하면 살 수 있는데 살길은 안 찾고 내부에서 서로 싸우기만 하는 당 인사들에게 일침을 가한 거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끌고는 가야하지만 내세울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열성 지지층의 자제를 당부했고, 핵심 친박 인사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자신들이 손해라고 생각해도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인명진 비대위에 대해서도 내부에서는 성과를 자화자찬했지만 그는 “미흡했다”고 잘라 말했지요. 이후 지금까지 세 번의 비대위가 더 들어선걸 보면 정치 고수들보다 그의 눈이 더 정확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하수인 나도 수가 보이는데…”는 그런 뜻입니다.

그는 당시 취임한 지 한달도 채 안된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조이구승자 필다패(躁而求勝者 必多敗)’란 바둑 10훈 중 하나를 들며 조언했습니다. ‘조급하게 이기려고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인데 “국정을 급하게 하지 말고 속도를 지키면서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 세월이 흘렀고, 이제 문 대통령의 임기도 1년 남짓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벌어진 검찰개혁,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부동산 정책 실패,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갈등 등 숱하게 벌어진 일들의 진행과정과 속도를 보면서 4년 전 그의 말이 왜 서늘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사족일 수는 있습니다만 그가 문 대통령에게 ‘조이구승자 필다패’를 조언했을 때 “정작 당신은 현역 프로기사 시절 행마가 아주 빨라서 별명이 ‘제비’아니었느냐”고 반문했지요. 빠르지만 이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는데 이렇게 답하더군요. “빨랐다. 그래서 창호(이창호 9단)에게 잡혔다”고요.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