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아르침볼도 ‘봄’, 1573년.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
봄과 오월은 피어난다. 인간의 어떠한 노력 때문이 아니라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한 피어나는 기운을 음악가들은 악상에 담고자 했다. 비발디는 ‘사계’의 ‘봄’을 왜 그렇게 작곡하였을까. 약동하는 충만함을 담아내기 위해 따뜻한 삼화음을 가득 울린다. 상승하는 기운을 표현하기 위해 선율은 완만하게 도약시킨다. 그러나 그 도약은 화려하거나 인위적인 느낌이 없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정중동의 온화함. 그것이 비발디가 떠올린 ‘봄’의 첫인상이다.
멘델스존의 ‘무언가’에도 ‘봄노래’(작품번호 62-6)가 있다. 누구나 기억할 만한 상냥한 이 작은 선율에서도 가볍게 위로 뛰어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위를 향하는 기운이 싱싱하나 여린 것이 봄의 느낌과 똑 통한다. 선율은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반주는 앙증맞은 움직임으로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강해서는 안 된다. 여리고 부드러운 느낌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금세 봄이 아니라 ‘여름’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슈만의 교향곡 1번 ‘봄’,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 등 봄을 느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은 셀 수 없이 많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라는 매혹적인 왈츠도 있다. 이런 작품들에는 예외 없이 음계를 타고 위쪽으로 상승하는 움직임과 온화한 화성이 들어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은 예외 없이 강렬해지는 유혹, 자기과시의 유혹, 다시 말해 여름이 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켜내고 있다. 봄이 진정 봄이 될 수 있으려면 저절로 찾아온 이 순간의 행복한 균형 상태를 복되게, 욕심 없이 누려야 하는 것이다.
봄을 봄답게 누릴 기회가 점점 귀해지고 있다. 봄이 사라지면 봄다운 예술도 소용없는 일이 된다. 아르침볼도가 사람 얼굴에 그려놓은 저 흐드러진 꽃들은 무얼 말할까. 인간이여, 그대 안에도 봄이 있었다. 그 봄을 여름으로 만들지 말자. 그때 그대 안에서 인간다움이 피어날 것이다.
나성인 클래식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