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ke.’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발음도 쉬워서 여기저기서 “우오크”라는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Wake(깨우다)’의 과거형으로 ‘깨어있는’ ‘정신을 차린’ 정도의 뜻이 되겠죠. 미국은 ‘정치적 올바름(PC)’ 정신이 크게 발달한 나라입니다.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을 삼가자는 것이지요. 우오크는 PC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생긴지 1,2년 밖에 안 된 신조어지만 벌써 미국인의 일상 대화 속에 많이 침투했습니다. “저 사람 참 우오크해” “그 드라마 우오크하지”라고 하죠.
우오크 열풍이 가장 뜨겁게 부는 곳은 문화와 교육 현장입니다. 문화 쪽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사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디즈니라고 하면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Happiest Place on Earth)’이라고 불려왔던 기업입니다. 그런데 요즘 별명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어있는 곳(Wokest Place on Earth).’
플루토, 도널드덕, 미키마우스, 미니마우스, 구피 등 디즈니의 인기 캐릭터들. 디즈니월드 홈페이지
지난해 말부터 디즈니는 자사가 제작했던 ‘알라딘’ ‘피터팬’ ‘인어공주’ ‘덤보’ ‘판타지아’ 등의 명작 만화영화 도입부에 “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경고문을 부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 그룹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는 등장 인물 이름이나 내용도 전체 스토리라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손을 봤습니다.
최근에는 사내 의식 개혁 운동에 돌입했습니다. ‘미래를 다시 그리자’라는 제목의 캠페인은 다양한 세미나, 집단 토의, 가이드북 배포 등을 통해 직장 내 차별 관행, 특히 인종적 차별을 뿌리 뽑자는 것입니다.
최근 일부 언론에 보도된 22쪽짜리 캠페인 교재 자료에는 “당신의 서재를 탈식민지화하라” “지역 흑인운동 단체에 기부하라” “경찰 해체 운동을 포용하라” 등 미키마우스 왕국에서는 보기 힘든 운동권 용어들로 장식돼 있습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일상 생활에 고착화된 만큼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전투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재에 따르면 직원 간의 대화에서 “평등(equality)” 대신 “공정(equity)”이라는 단어를 쓰라고 합니다. 과정을 중시하는 평등보다 결과로서의 공정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는 뜻입니다.
흑인 동료 직원과의 공감대 형성 대화법도 나와 있습니다. 인종 차별 경험 얘기를 들었을 때 “섣불리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 네 기분 알겠어” 보다 “잘 들었어. 더 말해줘”라고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디즈니사가 전개하고 있는 사내 의식개혁 운동 ‘미래를 다시 그리자’의 교재 자료. CNN
기득권 체감 정도를 알아보는 자가 체크리스트도 있습니다. “나는 백인이다” “이성애자다” “남성이다” 등 기본 인적 사항에서부터 “나는 대중 교통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성폭행을 당해본 적이 없다” “테러리스트라고 불려본 적이 없다” 등 상세한 개인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문항도 있습니다. 체크된 문항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반성이 필요한 기득권 그룹으로 분류됩니다.
외부 시선은 별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왜 지금 대규모 인종 다양성 운동을 전개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대해 직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아 자발적 참여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죠. 오랫동안 디즈니 왕국을 이끌다가 지난해 말 물러난 밥 아이거 전 CEO의 “퇴임 작품”이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15년 동안 디즈니를 이끌며 중국 상해 디즈니랜드 건설, 각종 영화 흥행 성공을 이뤄낸 밥 아이거 전 CEO. 데일리메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오크 열풍에 동참한 곳은 디즈니뿐만이 아닙니다. 교육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오크 운동은 초등학교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집니다. 인종 차별 정신은 어린시절에 굳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워싱턴 주의 체리크레스트 초등학교는 인종 문제를 토론하는 학생회의를 매월 개최합니다. 또한 ‘인종 차별에 대항하는 학생연합(SOAR)’라는 조직을 만들어 9~11세 학생들이 학교 차원의 인종 차별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의 메이어홀츠 초등학교 3학년생들은 자신의 인종 경제 수준 종교 성별 가족 관계 등에 기초해 ‘신분 지도’를 만듭니다. 교사는 “우리는 백인 기독교 남성 위주의 지배 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신분 지도’와 지배 문화의 특성을 서로 매칭시키면서 토론하는 훈련을 진행합니다. 일리노이 주 록우드의 초등학교 5학년생들은 최근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운동’의 설립자의 연설문을 읽어오라는 숙제를 받았습니다. 연설문에는 “시위가 세상의 새로운 규칙이다. 권력이 없는 자들은 시위를 통해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의 한 초등학교는 4학년생들에게 “성적 취향” 같은 단어들을 가르치고 타인을 부를 때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립적 호칭을 붙이도록 교육합니다.
유명 동문을 다수 배출한 뉴욕의 ‘브리얼리’ 사립학교. 최근 한 학부모가 학교 측의 지나친 인종 다양성 정책에 반발해 자녀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밝혀 주목 받았다. 자료: 뉴욕포스트
최근 뉴욕 사립학교 ‘브리얼리’의 한 학부모는 딸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겠다고 학교 측에 통보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학교는 캐럴라인 케네디 등 유명 동문을 배출한 연 학비 5만6000달러(약 6300만원)의 뉴욕 명문 학교입니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학부모의 편지에 따르면 이 학교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매달 인종 관련 강의를 의무적으로 듣게 하고,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BLM 운동과 마르크스 사상을 옹호하는 커리큘럼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님들이 “공정” “다양성” “포용” 같은 단어들을 마치 직업 운동가들처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 중국 문화혁명 시대를 연상시킨다”고 지적합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