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와 캐디로 찰떡 호흡 정상 동행 골프도, 가정도 모두 톡톡 뛰며 즐겁게
허인회(34)의 모자 정면에는 다소 촌스러울 정도로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 있었다. ‘BONANZA’. 노다지를 말한다. 1970년대 국내에서도 방영된 미국 TV 드라마 제목이기도 하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세 아들 스토리를 다룬 서부영화였다.
허인회가 모처럼 금맥을 캐내며 대박을 터뜨렸다. 며칠 전 경기 성남 남서울CC에서 끝난 GS칼텍스 매경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특히 나흘 내내 아내 육은채 씨(33)와 캐디로 호흡을 맞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시상식에서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우승 트로피를 바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는 평가다. 21일이 부부의 날이라는데 큰 선물을 안긴 듯 보였다. 2015년 동부화재 프로미 오픈 우승 후 6년 만에 통산 4승째를 거두며 5년 짜리 투어카드도 받아 한결 편하게 선수생활에 집중하게 됐다.
허인회에게 전화로 보난자 의미를 물었다. 캐디 아내의 모자도 같은 단어가 박혀 있었다. 메인스폰서냐는 질문에 허인회는 웃음부터 터뜨렸다. “하하. 누가 보드게임 업체 아니냐고 하던데 아니에요. 아버지가 태국에서 하시는 골프장 이름이에요. 지난해까지는 계약하고 달았는데 성적이 별로여서 올해부터는 그냥 달아드리고 있어요.”
●연습을 안 하고도 우승한다고 믿었던 이슈 메이커
‘4차원 골퍼’. ‘괴짜 골퍼’, ‘게으른 천재.’…. 허인회는 별명이 참 많다.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지녔다는 의미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허인회는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신인이었던 2008년 필로스오픈서 첫 승을 올리며 주목받았다. 승승장구할 줄 알았으나 5년 무관의 세월 끝에 2013년 헤럴드 KYJ 투어챔피언십서 2승째를 기록했다. 이 대회 우승할 당시 그는 마지막 날 티오프 40여 분을 앞두고 가장 늦게 대회장에 도착했다. 보통 선수들은 2시간 전에 골프장에 도착해 몸을 풀기 마련. 허인회는 연습 그린에서 공을 몇 개 굴려본 게 전부였다. “연습은 경기 날 아침에 아니라 평소에 해야 한다. 스트레칭은 1번홀 티샷을 한 뒤 걸어가면서 하는 걸로 충분하다.”
우승 후 소감도 귀를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그동안에도 연습을 안 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안 했기 때문에 우승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연습을 안 하고도 우승할 수 있다는 게 나도 신기하다.”
국군체육부대 시절 동부화재 프로미오픈에 출전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허인회. 동아일보 DB
통산 3승째를 거둔 2015년 동부화재 프로미오픈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심었다. 연장접전 끝에 우승을 확정지은 허인회는 굳은 표정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국군체육부대 소속의 현역 군인 신분이었다. 군인신분이라 우승 상금 8000만 원을 받을 수 없었던 허인회 일병은 ‘다’나 ‘까’로 끝나는 군인 특유의 말투로 소감을 밝혀 영 어색하기만 했다. 머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카레이싱과 오토바이의 속도감에 빠져들던 자유로운 영혼의 대명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와이프 캐디는 인생의 로망이자 이기적인 꿈
천재성과 달리 기복이 심했던 그는 결혼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가수 지망생인 현재의 아내를 2011년 모임에서 처음 만난 뒤 2014년 우연히 재회하면서 연인이 됐다. 2016년 한국오픈 1라운드 때는 몇 달 전 혼인신고를 하고 법적인 부부가 됐다는 사실을 공개한 뒤 골프장에서 프러포즈를 하기도 했다. 우승하면 제대로 혼례를 치르려 했지만 정상과 좀처럼 인연을 맺지 못하자 2019년 8월 인천 드림파크CC에서 결혼식을 올렸다.아내가 캐디로 나선 건 3년 전부터다. 허인회는 “와이프에게 캐디를 부탁한 건 그게 내 인생 로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애기가 생기기 전까지 내 이기적인 꿈을 따라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고생시킨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와이프가 캐디해서 안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를 3년 내내 들었다. 그래서 오기로 와이프와 함께 이겨내려고 했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게 된다. 결국 해냈다”며 기뻐했다.
허인회는 2015년 SK텔레콤오픈 2라운드 때 캐디 없이 혼자 캐디백을 메고 18홀을 돈 끝에 홀인원 1개에 버디 5개, 더블보기 1개로 5언더파를 몰아친 적이 있다. 1라운드를 함께했던 캐디가 이날 늦잠을 자다 티타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허인회는 “가방 무게를 줄이려고 평소 14개 클럽 중 드라이버, 3번 우드, 유틸리티에 5, 7, 9번 아이언 등 8개와 볼 3개만 갖고 라운드했다. 마실 물도 넣지 않았다. 힘이 너무 들어 나흘 경기를 한 뒤 다시 36홀을 돈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캐디는 맡은 요즘도 최대한 가방을 가볍게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캐디 늦잠까지 걱정할 일은 없다.
●필드의 안팎에서 내조의 여왕
보통 캐디는 보너스로 우승 상금의 10%를 받는다. 매경오픈 우승 상금이 3억 원이니 통상적인 사례금은 3000만 원. 허인회는 어떨까. “와이프한테 얼마 줄지 묻는 그 질문을 너무 많이 받는다. 나도 기꺼이 10% 줄 수 있다. 하지만 내 돈이 와이프 돈이고, 와이프 돈이 내 돈 아닌가. 암튼 기분이 너무 좋다.”허인회와 아내의 캐디 동행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도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다. 현재 같은 무관중 경기가 계속될 경우 부부가 대회 때 코스 안에서 함께 할 수는 없다. 허인회는 “갤러리가 입장이 허용될 때까지는 캐디로 계속 호흡을 맞추려 한다”고 말했다.
코리안투어에서 인기를 받기도 했던 허인회는 팬 서비스에도 각별한 신경을 쓴다. 사인이나 사진 촬영 요청에도 늘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게 코리안 투어 관계자의 설명이다. 허인회는 “하루 빨리 갤러리가 꽉 찬 골프장에 플레이하고, 우승 트로피도 들어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행운의 ‘4’자와 계속된 인연
“결혼을 잘한 것 같다”며 활짝 웃은 허인회는 전화번호 끝자리가 ‘4444’로 끝난다. 국내에 휴대전화가 처음 도입될 때부터 일부러 선택해 쓰던 번호란다. 갖고 있는 차량 번호는 ‘4000’이다. “누군가는 불길하다고 하지만 내게는 ‘4’가 행운의 숫자다. 서양에서도 럭키넘버 아닌가.” 기자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라 물었다. “이번 매경오픈이 몇 회째인지 아는가.”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40회 아닌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우승한지 모르겠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