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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이라도 찾았으면… 41년간 아들 기다리는 모정”

입력 | 2021-05-14 03:00:00

‘5월에 사라진 사람들’ <2>
행불자 아들 찾는 차초강 할머니



차초강 할머니가 11일 전남 담양에 있는 자택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큰아들 이재몽 씨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차 할머니는 “41년이 흘렀지만 아픔이 더 커져 가고 있다”고 했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1일 전남 담양군의 한 시골집에서 만난 차초강 할머니(82)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할머니는 “5월만 되면 가슴이 미어진다”며 울먹였다. 할머니의 가슴앓이는 5남매 중 큰아들인 이재몽 씨(당시 20세)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실종되면서 시작됐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는 5·18 희생자의 묘 901기가 있다. 정부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됐다고 공식 인정한 사람은 78명이다. 5·18민주묘지에 있는 5기의 묘는 시신은 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열사 묘’다. 69기는 5·18 당시 사라져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행방불명자 묘다. 나머지 4명은 가족들이 5·18민주묘지에 가묘를 쓰지 않아 묘가 없다.

행불자 묘는 5·18민주묘지 1묘역 10구역에 있다. 이 씨의 묘지 번호는 66번이다. 차 할머니는 “유골도 없는 가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생때같은 아들을 영영 찾지 못할까 봐 가슴이 타들어 간다”고 했다.

“1980년 5월 17일인가 19일인가 모르겠는데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가 끊겼어요. 재몽이가 용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어머니(이 씨 할머니)와 마늘을 팔러 광주로 갔어요.”

이 씨는 마늘을 지게에 지고 담양에서 광주역 인근 농산물공판장까지 할머니와 걸어갔다. 마늘을 팔고 인근 시외버스공용터미널(현 광주은행 자리)에서 기다리던 차가 오지 않자 1km 떨어진 대인시장으로 가던 중 이 씨는 시장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끌려갔다.

“혼이 반쯤 나간 시어머니가 집에 와서 시퍼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손자를 차에 싣고 갔다고 했어요. 아들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수소문했지만 허사였어요.”

가족들은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사정이 어두웠다. 할머니는 “재몽이가 사라진 뒤에야 광주에서 그 난리가 난 것을 알았다”고 했다.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진압한 19일부터 광주가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 씨가 붙잡혀 간 것은 교통편이 모두 끊긴 20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이 씨가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도 아니고 시골에서 올라온 평범한 청년이었기에 잡혀갔어도 곧 풀려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대문 밖에서 서성이며 손자를 기다리던 이 씨의 할머니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숨졌다.

차 할머니는 ‘아들이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행방을 감춘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1985년 사망신고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2009년 5·18 행불자로 인정받았다. 차 할머니에게 지난 41년은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아직까지 재몽이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유골이라도 찾아 묻어주고 넋이라도 달래줘야 할 텐데 생전에 그날이 올지 모르겠어요.”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