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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윤석열 현상’ 자초한 ‘문재인식 정치’

입력 | 2021-05-14 03:00:00

조국 끌어안은 문 대통령 선택이
지리멸렬 야권에 정권교체 활력 불어넣어
위기감 속 與 내부는 친문 견제 변신 몸부림 시작됐는데
野 중진들은 민심 수준 무시한 ‘영남홀대론’ 들먹이고
막말 올드보이들 마이크 다시 켜려 해
국민의힘 환골탈태 못하면 尹 입당 어려워지고
野 필패할 3자 분열 구도 초래할 수도




이기홍 대기자

‘윤석열 현상’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정권 탈환은 커녕 절멸의 위기감에 시달렸던 야권이 재·보선에서 압승하고, 정권교체 가능성을 시사하는 여론조사들이 나오는 현 상황의 밑바탕에는 윤석열의 등장이 있다.

아무리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이 극에 달해도 야권에 이렇다할 대선후보감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면 판세는 달랐을 것이다.

윤석열 현상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은 문 대통령이다.

2019년 9월 27일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처음 입을 연 문 대통령이 “검찰개혁”이 아니라 “조 후보자가 그런 삶을 살아왔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후보 지명을 철회했다면, ‘윤석열 죽이기’와 ‘윤의 거인화’는 없었을 것이다.

윤석열의 정치적 성장이 스스로 강단 있게 소신과 원칙을 지킨 결과물이라는 점과 별개로, 밟을수록 커지는 ‘헤라클레스의 사과’(이솝우화)를 1년 넘게 짓밟은 어리석음은 오롯이 문 대통령의 몫이다.

조국 사태 내내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왜 조국을 끝까지 끌어안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걸까….’

10일 취임 4주년 회견은 조국 문제 대응 방식을 낳은 문재인식 사고방식의 본질을 조금은 더 파악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 기자가 “대통령이 현 정권에 관련된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월성 원전 사건 등에 성역 없이 살아 있는 권력이라도 봐주지 말고 철저하게 수사하라고 김오수 후보자에게 공개적으로 지시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냥 “분명히 해둡니다. 검찰은 눈치 보지 말고 철저히 수사하십시오”라고 답하면 됐을 터였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이제 검찰은 별로 청와대 권력을 겁내지 않는 것 같다”고 에둘러 갔다. 검찰 제어의 문에 미리 자물쇠를 채우는 것은 피하려는 자기보호 본능의 발호였을까.

설령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지라도 민주주의 견제원리·검찰독립의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그런 철학·신념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 관련 수사팀을 공중분해시키는 인사조치가 왜 끊이지 않았는지 곱씹게 되는 장면이었다.

대통령은 회견에서 남북관계를 포함한 외교안보 문제에는 2분만 할애했는데 그중 말미 15초를 대북전단에 대한 강력한 대응 경고로 채웠다.

그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통령이 직접 온 국민 상대 회견에서 경고해야 할 사안이었나. 무언가에 집착이 너무 커서 사안의 경중·대소를 구분하는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우려되는 대목이다.

친문 댓글 답변을 비롯해 대통령의 발언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지지세력 의존 정치를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정마을 해군기지,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등을 감행한 결과 퇴임 후 극심한 고립에 처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런 문 대통령의 한계를 확인한 야당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 보면 야당에 유리한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최근 친문 핵심들 사이에선 자포자기론이 있었다고 한다.

‘윤석열과 맞붙으면 누굴 내세워도 안 되는 걸로 나온다, 그러니 국회 권력이라도 확실히 쥐자’는 생각에서 원내대표 선거 때 외연확장 대신 친문 후보에 표를 몰아줬다는 것이다.

당 대표 선거에서도 그러려고 했는데 0.59% 차이로 친문 후보가 졌다. 작은 반란이다. 여권의 ‘자가 치유력’의 발현인 것이다.

물론 송영길 김부겸 등이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확실히 할 만큼 과단성 있는 그릇인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누가 여당 대선 후보가 되든 대통령과 차별화하며 중도층 영합 행보를 본격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야당은 여전히 제자리를 돈다. ‘영남당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고 하니 바로 ‘영남홀대론’이 나온다.

영남홀대론이야말로 민심의 수준을 모독하는 주장이다. 호남이든 영남이든 유권자들은 자신의 지지정당이 지역정당의 한계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자기편이 당권이나 주요 당직을 차지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정권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만약 국민의힘이 환골탈태 못한 채 과거 인물들이 무대에 오르내리고 막말 올드보이들이 마이크를 다시 켜면, 윤석열의 합류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권 전략가들이 내심 가장 노리고 있을 ‘천하 3분지계(計)’다.

대통령 지지율이 지리멸렬하면 할수록 국민의힘 내에선 ‘민주당-윤석열-정통 보수’의 3자 구도로도 승산이 있다는 몽상에 빠지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다.

문 정권의 ‘민주주의 원칙·가치에 대한 철학 결핍+사안의 경중·우선순위 판단 미비+지지세력 집착’ 성향은 조국사태 같은 악수(惡手)를 낳았고 그 결과 윤석열 현상이 창출됐다.

하지만 좌파의 자기변신 능력은 무한대다. 미제축출을 외치던 민족해방(NL)계열 주사파 지도부는 1987년 초 개량노선이라고 비난했던 직선제 개헌투쟁으로 순식간에 노선을 바꿨다. 목적 달성을 위한 놀라운 유연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 중진들이 영남홀대론을 들먹이며 기득권에 연연하고, 보수의 몰락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다시 등장한다면 그것은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전략적 투표 각오를 다지고 있는 야권 민심을 배반하는 행위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