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구례 화엄사

구례군 사성암 내 돌벼랑에 세워진 유리광전 법당. 풍수적으로 명당 혈에 세워진 이 법당은 지난해 여름 홍수 때 10여 마리의 소떼가 피신해온 곳으로 알려진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호남과 영남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에 어느 한 나라가 온전히 차지해본 적이 없던 땅이다. 지리산 자락은 각 나라 백성들이 삶의 터를 공유하는 무대였다. 정치적 압박이나 관리의 횡포, 전쟁 등 환란(患亂)을 피하려고 찾아드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포용의 산이기도 했다.
그 중심지가 전남 구례군이고, 지리산의 넉넉한 품처럼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해온 곳이 구례 화엄사라 할 수 있다. 지리산 노고단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사찰이다. 화엄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립과 항쟁 대신 화합과 통합을 가르친다.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화엄 사상의 무대인 구례를 찾았다.
● 너그러이 포용하는 땅 ‘구차례’
구례는 북쪽으로는 전북 남원, 서쪽과 남쪽으로는 전남 곡성 광양 순천, 동쪽으로는 경남 하동과 접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례군 석주관성(토지면 송정리)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구례는 지리적으로도 화엄 사상을 펼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조선 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 사는 곳에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소출이 넘쳐나면 인심 또한 자연스레 넉넉해진다”고 하면서 “구례는 이 세 가지(경치, 물산, 인심)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 각 지역에 대한 ‘명당 점수’를 매기는 데 있어 다소 인색했던 이중환조차 극찬한 땅이 구례였다.
노자의 가르침에 ‘인법지(人法地·사람은 땅을 본받음)’라는 말이 있다. 땅이 넉넉하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도 여유롭고 푸근해진다. 백제 시절 구례가 구차례(求次禮)로 불린 설화에서도 이런 흔적이 나타난다. 백제 시대에 사이가 좋지 않던 두 정승이 있었다. 성격과 생각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며 싸웠다. 그러다 한 정승이 먼저 벼슬에서 물러나 구례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다른 정승도 은퇴 후 말년을 보낼 거주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두 정승은 구례에서 우연히 만나게 돼 구원(舊怨)을 풀고 함께 노년을 보내기로 했다. 두 정승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백제 왕은 ‘원수가 서로 예를 찾은 곳’이라는 의미로 ‘구차례’라는 지명을 지어주었다고 한다.(‘전남의 전설’에서)
● 화엄사를 빛낸 고승들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는 연기암 터에 세워진 관음전.
연기암은 본사인 화엄사와 밀접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서역 출신 승려 연기 조사가 맨 처음 수행하던 토굴 터가 연기암이라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깊은 산속에 숨겨진 명당 터를 콕 집어 수행 터전으로 삼은 솜씨를 보면 도력이 높은 수행자임은 분명해 보인다.
연기암에서는 구례군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마니차가 보인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와 화엄사로 들어서니 경내는 마치 큰 행사를 앞둔 듯 분주했다.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대웅전에 모신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경사까지 겹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화엄사상에 기반해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의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이들 목조 좌상은 3m가 넘는 초대형 불상으로 앞서 2008년 보물로 지정됐다. 조선 왕실 사람들과 승려 580명 등 총 1320명이 시주에 참여해 조성한 이 불좌상은 17세기 불교 사상과 미술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대웅전 삼신불 조성에는 화엄사가 겪은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1592년 왜군이 도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2차 전쟁인 정유재란으로 온 국토가 전란(戰亂)에 시달릴 때 화엄사 승려들은 승병(僧兵)을 조직해 왜군에 대항했다. 화엄사의 윤눌 대사는 조선 수군에 가담해 이순신 장군을 도왔고, 진주성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정유재란 때는 화엄사 주지 설홍 대사가 300여 승군을 이끌고 구례 의병들과 함께 요충지인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격렬하게 싸웠다. 그러나 압도적인 왜군 군사력 앞에 승군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후 화엄사 승려들에 대한 왜군의 보복은 잔인했다. 화엄사를 잿더미로 만들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지리산 골짜기 이곳저곳에 숨은 듯이 있던 작은 암자들까지 찾아가 불 질러 없애버렸다. 그만큼 화엄사 승려들은 왜군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덕문 주지 스님은 “각황전의 사방 벽을 장식했던 신라 시기의 석경(石經·돌에다 화엄경을 새겨놓은 경전)들도 그때 상당 부분 훼손되거나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면서 “일본 교토박물관 측은 당시 건너간 석경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안 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국내에서 가장 큰 석등(높이 6.4m)으로 국보 제12호다.
● 사성암에서 만난 도선 국사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사성암 소원바위 앞의 관광객들.
사성암은 영험한 기도처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로 구례 지역이 피해를 입었을 당시 10여 마리의 소 떼가 침수된 축사를 피해 사성암 꼭대기의 유리광전 앞마당으로 몰려와 목숨을 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사성암은 이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명당인 사성암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유명한 도선 국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가 사성암 내 석벽 동굴(도선굴)에서 수행하면서 풍수지리설을 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선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고 한다. 이인은 그에게 풍수지리에 대한 이치를 얘기하고 마을 앞 강변에다 모래로 산천을 그리고 사라졌다. 도선은 이후 모래 그림(沙圖)에서 산천지세(山川地勢)를 보고 풍수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사성암 인근에 사도리(沙圖里)라는 마을도 있다. 즉,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는 우리나라 ‘도선 풍수’의 출발지이자 전승지인 것이다.
사성암 근처의 섬진강 대나무 숲길. 구례군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산책 코스다.
구례=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