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미술자산 도약 이끈 ‘이건희 컬렉션’ 성급한 공개보다 공들인 조사연구 우선 국립 전시관 ‘국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
러스킨의 글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우리나라가 보다 확실한 ‘미술 자서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4월 28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 2만3000여 점이 국가에 기증되면서 국가 소유 미술품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됐다.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전달됐고, 일부는 기증작과 인연이 있는 지방 국공립 미술관에 기증됐다. 이번 기증은 ‘세기의 기증’이라고 평가될 만큼 양적으로 방대하고 질적으로도 뛰어난 작품들이 포함돼 미술계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컬렉션에서 빈약하다고 여겨졌던 부분이 상당 부분 보완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박물관 미술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문화역량을 실험하는 도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민병찬 관장은 이번 기증작을 제대로 연구하는 데 최소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작품은 2만1693점이나 된다. 이 중 절반은 문헌자료인 전적류이기 때문에 검토하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소장품을 등록하려면 작품의 보존 상태, 재질, 연대 등 하나하나를 검토하는 ‘컨디션 체크’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단순 수치만으로도 소장품이 일시에 15%가 늘어난 셈인데 이를 조사·연구하는 미술관 전문 인력이 그렇게 신속하게 확보되는지 염려스럽다. 국민적 관심사이기 때문에 기증품을 조속히 공개하고자 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막상 기초 연구조사에 돌입하면 예측불허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시급한 공개를 선언하기보다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신중하게 검토한 후에 공개를 약속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한편 기증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이건희 미술관’의 설립을 유치하고자 하는 지자체가 속속 등장해서 이제 그 수를 세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사실 기증된 이건희 컬렉션의 양과 질을 생각할 때 별도의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이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 형식으로 운영되거나 아니면 제3의 독립기관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결과든 우리 미술관 역사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 미술관 앞에 있는 ‘내셔널’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바라볼 필요도 있다. 우리는 ‘내셔널’을 설립 주체인 정부를 뜻하는 ‘국립’으로 보지만, 미술관의 역사에서 이 용어는 ‘국민을 위한’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즉, 귀족이나 지배층들이 누리던 미술품을 국민들에게 허용한다는 의미로 ‘내셔널’이라는 명칭을 미술관에 부여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미술관 이용률은 놀라울 정도로 낮다. 2019년도 기준 16.5%로 연간 우리나라 국민의 83.5%는 미술관에 일 년에 한 번도 가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미술을 국가의 자서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펼치지 못한 국립미술관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기왕에 이건희 컬렉션으로 미술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겼으니 이를 계기로 우리의 국립미술관도 내용과 형식에서 국민에게 좀 더 다가가는 ‘국민을 위한’ 미술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