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2002년부터 60일 제한 이어와 우울증 환자 급증에 논란 재점화… 정신과 없는 지역 접근성도 문제 “제한 풀면 자살예방 도움” 목소리… 정신과선 “전문진료 우선” 반박 “도서산간선 예외로 둬야” 주장도
충남 홍성군에 위치한 삼성연합의원 현영순 원장은 환자들에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권하는 게 주요 일과 중 하나다. 환자의 30%가량은 노인성 우울증 치료가 시급한 상태다. 하지만 고령 환자 대다수는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거부감이 크다. 현 원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이웃과 교류가 줄어들면서 고립감을 호소하는 노인들이 크게 늘었는데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가까운 동네 병의원에서도 우울증 약 처방은 가능하다. 하지만 선호하는 항우울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는 비(非)정신건강의학과에서 60일까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보통 1년 이상 장기 복용해야 효과가 큰 항우울제를 두 달만 처방하는 건 우울증 치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 원장은 “정신건강의학과 방문이 어려운 시골에선 가까운 동네 의원에서 항우울제 처방을 쉽게 받을 수 있어야 자살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 SSRI 처방 늘면 자살률 낮아질까
국내에서 이 같은 항우울제 처방 제한이 생긴 건 2002년 3월부터다. 정부가 건강보험 급여 기준을 강화해 정신건강의학과를 제외한 일반 병의원에서 SSRI 항우울제 처방이 어려워졌다. 우울증 환자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에게 진료받게끔 하고 SSRI 남용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당시엔 SSRI 가격이 비싸 건강보험급여 지출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진료권을 제한받은 다른 과들은 “부작용이 더 큰 다른 우울증 약들은 처방 제한이 없는데 SSRI만 규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반발해 왔다. 논란이 지속되자 보건복지부는 2017년부터 치매, 뇌중풍(뇌졸중), 뇌전증, 파킨슨병 등 거동이 불편한 뇌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는 처방 제한을 풀었다.
신경과, 가정의학과 학회 등에선 SSRI 사용률이 낮은 것이 한국의 높은 자살률과도 관련이 크다고 주장한다. 두통, 불면증 등 몸에 이상을 느껴 동네의원을 방문한 자살 고위험군에 내과, 산부인과, 가정의학과에서도 SSRI를 적극 처방하면 극단적 선택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한 연구에서는 자살자의 76%가 사망 전 한 달 이내에 1차 의료기관(의원급)을 내원한 것으로 조사된 적도 있다.
홍승봉 대한신경과학회 이사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1990년대 초중반 SSRI가 상용화된 대다수 국가에서 자살률이 급감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SSRI 처방에 제한이 없다”며 “한국은 환자들의 우울증 치료권이 박탈당하면서 자살률을 낮추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시군구 37곳에 정신건강의학과 없어
정신건강의학과에선 SSRI 처방 제한을 완화하면 진료의 질이 낮아질 것이라고 반박한다. 약 처방은 우울증 치료의 60∼70%일 뿐이고 나머지는 전문의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담 등 복합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나래 한림대 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국은 의료 접근성이 뛰어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쉽게 만날 수 있다”며 “다른 과에서 발견한 우울증 환자를 전문의에게 빨리 연계하는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농어촌의 낮은 의료 접근성도 문제다. 2019년 말 기준 전국 229개 시군구 중 정신 의료기관이 없는 지역은 37곳이나 된다. 강원도는 18곳 중 10곳, 경북은 23곳 중 8곳에 정신건강의학과가 없다. 권준수 서울대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는 “모든 병의원이 SSRI를 처방하는 것은 안 되지만 환자 이동이 어려운 도서산간 지역은 예외로 두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준형 인제대 일산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다른 과들도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 전문성은 존중한다”며 “다만 동네 의원에서도 자율적으로 항우울제를 처방할 수 있어야 환자의 정신 건강을 적극 돌보는 환경이 조성되고 자살 고위험군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