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궤적(전 2권)/오쿠다 히데오 지음·송태욱 옮김/1권 400쪽, 2권 440쪽·각 1만4500원·은행나무
게티이미지코리아
비슷한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면 이와는 반대의 관점을 제시하는 이 책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는 전작 ‘나오미와 가나코’ 발표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이번 장편소설에서 평범한 사람이 아동 유괴를 저지르기까지의 궤적을 탐구한다. 유머러스한 인물부터 잔혹한 범죄자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자유자재로 그리는 작가의 필력이 이번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설은 1963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발생한 ‘요시노부 유괴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당시 4세였던 무라코시 요시노부는 신체장애를 앓던 고하라 다모쓰(당시 28세)에게 유괴됐다. 단순 실종사고로 본 경찰의 부실한 초동수사로 인해 아이는 사건 발생 2년 후에야 백골 시신으로 발견된다. 당시 고하라는 일반 가정에 갓 보급되기 시작한 전화를 이용해 아이의 부모에게 몸값 50만 엔을 요구한 뒤 돈만 챙겨 도주했다. 범인은 목격자 진술에 의해 경찰에 붙잡혔다.
1963년 일본 도쿄에서 유괴된 무라코시 요시노부(당시 4세)를 찾는 전단(왼쪽 사진)과 1965년 붙잡힌 범인 고하라 다모쓰(당시 28세). 작가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통해 범죄의 시작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사진 출처 아사히신문
작가는 수사 상황을 치밀하게 재연하면서 범죄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좇는다. 유괴가 발생하기 수개월 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소설은 1권 내내 범인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을 면밀히 묘사한다. 빈곤에 시달린 범인이 소설 초반 빈집에서 푼돈을 훔치는 대목을 읽을 때만 해도 나중에 그가 아동유괴와 살해를 저지르리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중대 범죄의 실체를 마주한 대중의 반응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언론은 부모에 의해 자해공갈에 이용당한 과거 등 범인의 어린시절을 파헤치며 범죄의 원인을 그의 불행했던 개인사에서 찾으려고 한다. 작가는 “귀축(鬼畜·인륜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소행을 접했을 때 뭔가 이유를 붙이지 않으면 사람은 불안해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작가는 폭넓은 취재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연쇄폭발 사건을 다룬 전작 ‘올림픽의 몸값’(2008년)을 집필할 당시 관계자 인터뷰는 물론 당시 경찰 조직도와 수사 방법, 날씨까지 철저히 조사했다. 이번 장편에서도 탁월한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은 도입부에서 청어낚시가 벌어지는 홋카이도 바다와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그리는데, 망망대해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며 긴장감을 일으킨다.
소설은 가해자와 그를 쫓는 경찰, 피해자 중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저 그가 창조한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빠짐없이 기록할 뿐이다. ‘죄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숙제를 풀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어느 서늘한 밤, 이 책을 펼쳐도 좋을 것 같다.